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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Sep 06. 2023

맹인에게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

책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


누군가 말했듯 언어는 언제나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감히 선뜻 표현할 수 없는 내 몸을 감싸는 기체로써의 삶은 액화되고 응고되어 육체에 엉켜 붙을 때에만 뒤늦게 비로소 아 거기에 무언가 있구나, 라는 걸 깨닫게 한다. 규범적 관습에 물들어 미처 알지 못했던 비가시화된 어떤 삶이 존재함을 깨닫게 한다.


김연수 작가가 번역했다 해서 호기심이 일었던 작품. 영문명이 The Cathedral 인 줄 알았는데 그냥 Cathedral 이었다. 작품 속 두 인물이 공통으로 알고 있는 화젯거리인 대성당은 '보는 자' 와 '보지 못하는 자' 간에 오가는 이야깃거리로써의 매개에서 <관계를 역전> 시키는 무언가로 작용한다.


맹인에게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 어쩌면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 있는 문을 여는 행위. 문을 엶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을 인지하게 된다. 그들의 삶이 우리 몸을 통과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레이먼드 카버는 '현실' 의 언어를 사용해 현실의 삶을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물론 현실의 정의가 누구에 의해 내려지느냐에 따라 그 정의는 퍽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작품 속에서 그리는 이들의 삶이 내 삶과 그리 다른 것 같지 않아 공감이 갔다.


인생은 기차와 같고, 우리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일방향 선로 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들을 관망할 수밖에 없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삶을 관조하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고, 각자의 삶과 각자의 입장은 서로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이해의 통로를 차단한다. 그러나 작품은 그럼에도 각자의 객실이 통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그 속을 오가는 동시대의 삶이 존재함을 동시대의 언어로 표현해 낸다.


발췌

[...]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계속해. 멈추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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