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가 출간도 전에 자신 있게 서평단 모집을 한 이유를 알겠다. 영화화된다는 것도,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치유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겠다. 가볍고 술술 익히는 문체이나 매 구간마다 멈칫하게 만드는 구간이 있었고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풀어나가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점층적으로 파고들게끔 만드는 신기한 작품.
불운의 사고로 엄마를 잃고 다리에 평생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샘. 아픈 언니로 인해 방임되다시피 자라온 세이디. 외롭고 몸도 마음도 아픈 두 아이는 게임을 통해 친구가 된다. 게임을 통해 육백여 시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아이들은 게임이 그 어떤 것보다 내밀한 행위임을 깨닫는다. 함께 게임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고 상대로 인해 다치더라도 감내하겠다는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행위임을 깨닫는다.
비록 한 순간의 오해와 무신경이 두 사람을 오랜 세월 갈라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영원한 친구. 다시 만난 아이들은 이제 게임을 함께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함께 게임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고자 한다. 그들이 겪어온 삶과 아픔이 녹아든 세계. 샘과 세이디는 어떻게 하면 게임 속 인물의 여정을 더 편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고,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이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이 그들 자신임과 동시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이 순탄했으면 하는 바람은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끔 만드는 매직 아이와 같은 기술이 동반되어야 했다.
인생이라는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과 같다. 그 어떤 이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의 불확실성을 예측할 수 없으나, 더불어 그 어떤 이도 NPC가 아니다. 불공정한 게임 판에서 숱한 인종차별적 모욕과 눈물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샘의 애나 리. 평생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경계를 오가며 외롭게 살다 간 마크스의 애나 리. 왜 그들에겐 부당한 삶을 '견뎌냄' 이 당연했을까, 아니 왜 그들에게만 당연하다 주입됐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그 불공정함을 견딜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던 동현과 봉자의 삶에서 비롯된 애나 리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 애나 리(들)의 희생 위에서야 비로소 샘과 마크스가 삶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건 아닐까.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결국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을 그려보는 것. 어쩌면 한 사람이 직면할 세계 자체를 탐구하는 일이었다. 게이머가 직면할 숱한 찬탄과 반박의 대립을 설계하는 과정 속에서 게임을 디자인하는 샘과 세이디도 성장하게 된다.
서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시작하는데,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의 삶을 살아가며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선 타인에게 손 뻗고 손 내밀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려면 어쩌면 모든 구성원이 죽지 않고, 모두를 충분히 먹이고, 그렇다고 너무 빨리 가지 않고, 장애인도 이민자도 포용하는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 작품은 주류의 시선에선 비가시화되어 '눈에 힘을 뺐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매직아이와 같은 삶을 두고 환한 미소를 보일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애써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인생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요,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는 불쌍한 연극배우에 불과하나, 그래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앞에 놓인 무한한 날들을 개척해 나가며,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버거운 짐은 어느 누가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되새기며.
문학동네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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