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얻은 긴긴 휴가를 밀린 독서와 독후감 쓰기로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밀린 독후감이 많지만, 그 다짐의 시작은 코호북스에서 보내주신 <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에 관한 글을 쓰기로. 소개글에 워튼이 언급되어 있길래 군말 없이 신청했었는데 보내주셔서 감사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20년대는 중요한 시기 중 하나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디스 워튼 등 내로라하는 문호들이 개성을 드러내던 시기였고, 그 속에서 이 작품의 작가인 부스 타킹턴 또한 소설로써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떨치던 시기였다고 한다.
작품은 앨리스 애덤스라는 인물의 부모를 그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가 무르익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현실' 에 적응하지 못한 채 옛 규범적 이야기들을 주절거리며 가족들과 갈등을 빚는 아버지, 자기가 아니면 딸이라도 눈에 보이는 화려한 현실의 변화를 좇아가며 살기를 바라지만 녹록지 못한 현실에 히스테리컬 하게 변해가고 있는 어머니,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자각하는 듯 보이며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남동생, 그리고 주인공 앨리스 애덤스.
계층이 무엇인지, 자본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던 십 대 시절엔 누구보다 인기 있던 앨리스였으나, 성인이 되니 상황이 변해버린다. 얼굴만 예쁘면 되었던 시절과는 달리, '괜찮은' 배필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배경> 이 필수적이었다. 사교계에 진출하기 위해, 더 나아가 결혼을 하기 위해 그녀에겐 뒷배가 되어줄 배경이 필요했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러한 '배경' 이 될 수 없었다.
늘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만의 이상적 자아를 꿈꾸던 앨리스. 원하는 결혼 상대를 만난 이후 부유한 집안의 곱게 자란 아가씨인 척 거울 속 또 다른 자신을 연기하지만, 세상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꼭꼭 숨기고만 싶었던 보잘것없는 배경을 조롱하듯 까발린다.
표지는 앨리스가 간절히 모으던 꽃을 형상화한 것일까. 러셀에게 앨리스의 실체가 밝혀지던 순간이 참 슬펐는데, 한편으론 작품의 끝이 앨리스의 수치로 끝나는 게 아니어서 좋았다. 오히려 앨리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몽상적 갈망이 깨지고 진짜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아서.
어려운 작품은 아니지만 오늘날 평범하지만 더 나은 삶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작품인 것 같다. 무엇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앨리스들에게 사실 자본의 논리로 굴러가는 이 세계에서의 네 삶이 조롱당해 마땅한 삶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더 나은 삶을 욕망하며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 자신을 좌절시킨 현실 속에서 성장하고야 마는 여성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