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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Dec 13. 2023

매스게임과도 같은 정상성의 폭력, 누가 괴물인가

영화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사카모토 유지 극본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작이자 사카모토 유지 작가작인 영화 괴물을 봤기에 감상을 썼던 걸 정리해서 포스팅합니다. 사카모토 유지 작가가 영화 각본을 썼다는 이야기에 고민 없이 바로 예매했었고요. 영화가 좋아서 두 번 봤고 아마도 올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 감상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고 개인 감상이니 비난은 삼가주세요.


당연히 스포 있습니다.




불 타는 걸스바


영화의 시작은 한 아이의 발걸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도시와 멀찍이 떨어져 혼자 밤을 걷는 어린아이. 아이의 걸음을 비춘 후 카메라는 곧 도시 중심부 한 건물의 화재를 비춥니다.


화재의 중심은 유흥 업소, 걸스바입니다. 걸스바를 유흥업소의 끝판왕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한 사회 내 정상성의 가면 뒤에서 온갖 원초적 욕망과 욕구가 배설되는 저수지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카메라는 그 '저수지' 의 불탐을 멀찍이 지켜보는 미나토와 사오리를 비춥니다.


사오리는 불타는 건물을 보며 간바레! 라고 외칩니다. 그것은 걸스바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단 의지로 타오르는 에 대한 응원이었을까요, 불을 진압하고 다시금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응원이었을까요? 중요한 건 그 불 속에서 걸스바를 소비하던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걸스바 직원들만이 보였을 뿐. 마치 화재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안전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듯이요.


사실 작중 내내 요리가 불을 가지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며 걸스바 방화의 범인은 요리인 게 암시됩니다. 즉 요리가 곧 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불은 부정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요리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최소한의 방어막이었고, 아빠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요리의 불보다 아빠가 강요해서 먹였던 물, 잠기게 했던 물이 더 컸다는 거지만 말이죠.




소문, 그리고 목소리


극은 내내 한 사람을 둘러싼 겹겹의 소문에 소문에 소문을 보여주는데 안개, 진흙과도 같은 소문을 뚫고 들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얼굴을 알고, 그 아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용기 있는 과정이 극이 보여준 미나토의 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미나토가 머리를 자르던 장면은 요리를 "얼룩," "돼지 뇌" 로 취급해야 한다는 내면화된 어떤 목소리의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그 목소리가 미나토 '본인의 목소리' 가 아니라는 것은 요리가 괴롭힘을 당할 때 교실에서 온몸으로 난동을 피우던 것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스게임Mass Game


극 중에서는 매스게임Mass Game 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매스게임? 이름 그대로 집단·단체 중심적인 게임입니다. 무리에서 흐트러지는 순간 웃으며 핀잔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게임이구요. 그리고 미나토가 '남자답지 못하다' 는 핀잔을 들었던 게임이기도 합니다.


작중 내내 어떤 사건이 발생하든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계' 가 중요하죠. 매스게임을 잘 이루면 되는 거예요. 뜻하지 않게 정상가족의 궤도에서 벗어난 싱글맘이지만 아들을 반듯하게 키우고 싶은 사오리, 뜻하지 않게 싱글맘 아래에서 자랐지만 반듯하게 자라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고 싶었던 호리.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좋은' 설계를 행하며 가정 내, 교실 내 매스게임을 유도합니다.


즉 이렇듯 매스게임의 규율은 학교 내 운동장에서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흠집과 얼룩도 용납지 못하는 정상가족 • 정상학교 • 정상사회에 대한 집착은 개인에게 사오리 • 호리 • 마키코라는 이름을 지우고 엄마 • 교사 • 학교의 역할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아들을 "평범하고 어디에나 있는 가족" 을 꾸릴 수 있는 성인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싱글맘 사오리의 강박으로, 학교 안팎에서 아이들을 지도 교정하겠다는 호리의 강박으로, 학교 내 그 어떤 얼룩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 청소하는 교장 마키코의 강박으로, 품종개량을 운운하며 요리에게 학대를 가하는 키요타카의 폭력성으로 드러납니다.


사오리는 아들인 미나토가 자신과 "일상" 을 공유하기를, 호리를 비롯한 학교가 "진실" 을 공유하길 바라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호리 또한 미나토가 "진실" 을 이야기해 주길 바라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사오리와 호리는 미나토로부터,
진짜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원하는 답' 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가정 • 학교 • 사회. 진짜 속내를 침묵하게 만드는 가정 • 학교 • 사회. 어쩌면 사회의 매스게임과 같은 폭력성을 내재화한 채 어른이 된 그들이 미나토와 요리에게 강요하던 진실은 미나토와 요리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미나토가 죽은 아빠와 공유하길 바랐던 일상은 제도 속에 산 사람인 엄마는 들어선 안 되는 무언가였듯 말이죠. "(아빠) 나는 왜 태어났어."




몰래카메라, 그리고 어항


극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인 놀이는 몰래카메라입니다. 철저하게 가해자 위주의 놀이방식이라고 생각하고요. 피해자의 당황, 분노, 슬픔을 희화화하게 만드는 사디스트적 놀이방식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몰카 밖 카메라를 든 사람은 어항 밖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물은 폭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극 중 인물들은 어항 속 물고기와 다를 바 없고 실제로 어항은 호리의 어항에서 학교의 수족관으로, 버려진 폐선으로, 학교를 둘러싼 호수(와 댐)으로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타납니다.


규범 질서를 반영하는 매스게임과 같은 강제와 억압. 요리는 사회 규범의 '교정' 을 받을 때면 어김없이 물을 마십니다. 아마 이는 아버지 키요타카로 인한 학습된 결과라 생각하고요. 극 중 요리가 학교에 나오지 않고 욕조 안에 잠겨 있던 모습은 요리를 향한 키요타카의 폭력의 절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폭력이 가정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방관하였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학교가 '방관' 할 수밖에 없었던(사실 순전히 몰랐던 거지만) 상황을 1, 2막을 통해 설명했다고 봅니다. 의도치 않게 일어난 일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학교. 유체이탈과 같은 일방향적인 사과. 그런 사과를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사과를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사회.




존재하는 것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런 사회 속에서 요리는 사회가 규정한 역할이 아닌 '이름' 을 부르는 아이입니다. 요리는 "남자아이가 꽃의 이름을 불러선 안 된다" 라는 사회의 통념과 달리 거리낌 없이 좋아하는 것의 이름을 부릅니다. 좋아하는 것의 이름을 부르고,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했던 흔적을 알아보는 아이입니다.


어쩌면 그런 요리가 세상에 이름과 쓸모를 잊힌 채 버려진 폐선을 찾아낸 건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요리는 미나토에게 자신의 '세계' 가 된 버려진 폐선을 소개하고, 두 아이가 폐선 안과 폐선 밖에 존재하는 장면은 각기 다른 시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재밌게도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둘은 푯말을 세워두는데, 거기에는 "나 있어." 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나 여기 존재해. 너도 거기 있는 거지?




교정, 그리고 호른


생각해 보면 극 중 요리가 문자를 읽고 쓰는 순간들이 나오는데, 그 순간, 이미 규범의 질서에 편입된 어른들의 반응과 요리를 비롯한 아이들의 반응이 대조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문자권력과도 다름없는 언어는 주류 규범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그 체계 속으로 한 존재를 편입시키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수업 시간에 떠듬떠듬 글을 읽는 요리, 어른들이 가르쳐준대로 아픈 친구에게 다정한 편지를 보내고자 하지만 아직 '미숙한' 단계인 요리. 그 모든 단계에서 어른들은 교사로서, 친구의 어머니로서 개입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요리를 교정하려 듭니다.


미나토 또한 죽은 아빠가 아니고서야 살아서 제도 속에 존재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교장 마키코가 호른을 주었던 거라고 생각하고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호른 소리로라도 털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 .




물과 어항, 그리고 폐선


학대당한 채 욕조에 잠겨버린 요리를 어항과도 같았던 욕조 밖으로 끄집어내준 건 다름 아닌 미나토였습니다. 버려진 폐선을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만드는 순간들이 금붕어들을 위해 '꾸며진' 어항/수족관과 대비되어 보여서 먹먹했고요.


미나토와 요리를 억압하던 컵 속 물, 욕조의 물은 이제 태풍을 동반한 폭우로 와서 아이들의 세계를 감싼 폐선을 내리칩니다. 아이들은 그 폭풍우에 폐선이 안전할까 걱정하며 그곳으로 향했고, 타임머신과 같은 폐선은 아이들을 '이곳' 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폐선 안 공간은 인습에 저항하는 불과 같은 이들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에 이미 바깥세상의 물과 한 몸인 채 어른이 되어버린 사오리와 호리는 아이들이 보는 세계와 같은 세계를 볼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괴물은 누구인가


재밌는 건 포스터는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아이들을 물 속에 잠기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이 인간 사회의 산물이란 겁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싱글맘에 대한 편견, 교사의 역할에 대한 요구 등. 그 모든 걸 인간이 만들어낸 거고,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인습을 뒤집어쓴 인간들은 성소수자, 싱글맘, 교사를 비롯한 구조 속 약자인 이들에게 인간이 아닌 "얼룩" 이라 일컫고 "돼지 뇌를 가진" 이들이라 이야기합니다.


괴물은 누구인가, '정상' 을 만들고자 매스게임을 종용하는 인습 그 자체인 사회. 저항 없이 부지불식 간에 인습과 한 몸이 되어 피라미드 최하단의 존재에게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답습한 이들, 이라고 제 나름의 결론을 내립니다.




남아 있는 이들에게


사실 미나토와 요리가 일본 사회의 규범에 편입되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자신들만의 세계로 향했고 외부에서는 그들의 행방을 못 찾았다는 면에서 엔딩이 새드라는 감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는 영화가 아이들의 행방불명 보다는 그 아이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렸다고 생각합니다. 결말의 해석이야 어떻든 아이들은 스스로의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제는 남겨진 사오리와 호리가 다시 사회로 돌아가서 어떤 변화를 줄 것이냐겠죠.


미나토와 요리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또 다른 상처받는 미나토와 요리가 없게 '역할' 이 아닌 진짜 '이름' 을 불러주며 진심을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극본이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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