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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Apr 07. 2024

깨어진 뒤 돌아보는, 파편화된 가족 연대기

영화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감독


몰입감이 엄청 좋다. 법정 영화로서 정말 흥미진진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한 독일인을 냉정한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는 프랑스인들의 심리적 집단린치 같기도.. (농담) 이 영화에서 재밌는 건 제목은 시각 정보를 담보로 하는 '추락' 의 '해부' 를 말하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전반부 내내 소리를 비롯한 청각 정보로 상황을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영화는 초반부터 "독자는 책의 일부" 라는 말과 함께 관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며 시작한다. 실화임을 전제하지만 그 실화가 독자에겐 불편할 수 있음을, "직접 봐야 한다" 고 이야기 하나 "오직 경험한 일만 보여야 하는가" 에 대한 모순적 의문을 남긴다. ‘말’ 로 끄집어내야만 하는,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갈증… 진실은 뭘까?


초반부 작품은 그 어떤 면으로 보든 두 사람의 단절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런던 대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의 고향인 프랑스로 왔고, 그 공간에서 "프랑스인" 남편과 "독일인" 아내는 "영어" 로 대화한다. 이후 독일인 산드라는 프랑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영어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이 두 사람의 관계, 프랑스라는 사회 속에서의 산드라의 위치를 보여주는 확장 같았다. (냉정하고 극악무도한 여자라는 온갖 오해는 덤)




공간 상으로 위층은 남편의 공간이고 아래층은 아내의 공간. 위층에는 비록 게스트하우스를 마련하는 중이라곤 하나 그럼에도 사적 공간 밖에 없고 가족 외 구성원을 들이고 사회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래층에 있다. 이렇듯 집안 내 공간의 분리는 두 사람의 사회적 교류에 대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게끔 하는데, 가족들을 개의치 않고 집안에서조차 자유롭게 타인과 사회적 교류를 하는 이는 아래층을 차지, “자기만의 시간” 이 필요하다 주장하며 자의로든 타의로든 안으로, 안으로 이동한 이는 위층에 자리한 셈이 아닌가.


실제로 가사 분담의 기울기로 인해 남편은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집안에서 머물며 아이의 홈스쿨링을 관리했고,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집이라는 공간 내 '가족' 이라는 이름의 타인과의 영역 경계가 흐릿해졌다. 이에 남편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나 일찍이 소통단절된 두 사람 간에 소통이 될 리 없고, 그렇게 두 사람은 공간상 분리로 멀어진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자신의 공간에서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따금 다른 여성과의 대화 소리, 음악 소리와 같은 청각적인 거슬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지시키면서... 안타까운 건 두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가 처음부터 그러한 건 아니었단 거다. 산드라는 그 많은 이들 속에서 "남편의 말은 이해가 됐고, 남편이 말하면 모든 게 쉽고 생생해졌다" 고 이야기한다.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아들의 사고가 두 사람을 어두운 터널 속을 걷게 만들었다는 안타까운 사실.


영화상 두 사람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상층부에 위치하던 남편이 하층부로 내려오는 과정은 죽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죽음은 추락의 결과를 보여줄 뿐 그 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고, 영화는 결과에서 과정으로, 과정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한 건 추락의 결과는 시신 해부를 비롯한 시각 정보로 해석이 되나 과정은 청각으로 해석해야 하고,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의 충돌과 모순 속에서 관객은 그 어떤 명확한 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모호한 상태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하게 된 채로.




작품 속 인간들은 모두 청각으로, 구체적으로는 말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만 자기 방어적 기억에 의존하는 말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진실을 알고 말하고자 해도 (1)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신이 생각한 바를 온전히 언어화할 수 없어서 (2) 상황적 제약으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어서 (3)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판단의 근거가 될 모든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기에, 각자가 말하는 파편적인 사실은 진실에 다가갈 근거로 불충분하다.


흥미로운 건 그 모든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언어화할 수는 없지만 '눈' 을 통해 목격한 이가 강아지 스눕이라는 것. 자신의 상태와 심리를 투영해서 스눕의 마음을 이야기한 아빠를 떠올리며 다니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중 "그런 건 없겠지만 그렇게 주세요" 라는 말이 보여주듯 영화 전체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겠지만 그렇게 믿어, 라고 조소하는 것만 같았다. 끝내 진실은 알지 못한 채 다시 화면 밖으로 추방당한 기분이랄까. 영화를 다 본 후 당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겠는가. 어쩌면 진실이란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숙제를 품고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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