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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Dec 31. 2023

입 안 가득 삼켜버린 절규 속에서

책 <숄(The Shawl)>, 신시아 오직 저


홀로코스트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일컫어지는 신시아 오직의 단편 <숄> 과 <로사>.


강제수용소 생활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 죽음의 그림자와 같았던 숄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혼 없는 시체와도 다름없는 로사 대신 어린 스텔라와 마그다를 추위와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양분이자 보호막과도 같았다. 나치의 서슬 퍼런 감시 속 침묵이 곧 생존이나 다름없었던 공간에서 숄은 어린아이들, 특히 어린 생명 마그다의 존재를 숨겨주고 보호해 준다. 그러나 어린 마그다만큼이나 스텔라 또한 보호가 필요했고, 그렇게 한정적인 숄의 존재는 마그다의 발각과 뒤이은 죽음을 초래한다. 죽음의 광경은 마치 여린 나비가 전기불에 타 죽는 듯한 참혹한 광경이었고, 로사는 이로 인해 평생을 지옥 불구덩이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녀 로사, 살아남았지만 전기 쇠창살에 타 죽은 마그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죄책감에 잠식당한다. 입안 가득 숄을 욱여넣은 채 고통의 절규를 삼켜야만 했던 그때의 무력함. 침묵은 로사의 육체를 지켜주었으나 평생을 삼킨 절규 속에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스스로를 생지옥 마이애미에 감금하며 살아가게끔 만든다. 로사는 살아남았지만 앞으로의 삶으로 나아가길 거부했으며, 그에 반해 스텔라는 그때의 기억을 돌아보길 거부하며 강박적으로 눈앞에 닥친 삶을 살아내기에 급급하다.


로사가 구대륙에서 겪은 참혹한 기억은 신대륙에서 만난 무심한 이들의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끼고 구대륙의 유산을 찬양하나, 정작 현실 속 로사의 기억과 울부짖음은 외면하며 그녀를 "미친 여자" 로만 낙인찍을 뿐이다. 로사의 폴란드어는 세월이 흘러도 갈수록 세련되어지나, 로사의 영어는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처음 접했던 그때처럼 어설픈 누더기 영어 상태에 불과하다. '올바른' 영어를 구사하길 거부하며 스스로를 더욱더 깊은 고립 속에 가두는 그녀의 삶은 사실 나치가 "삶을 앗아간" 순간부터 이어지는 길고 긴 트라우마의 후유증일 것이다.


문학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공간이 언어로서 오롯이 내 앞에 재현되는 경험을 준다. 그 재현은 때로는 일렁이는 물결을 그린 회화처럼 때로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절규처럼 다가온다. 반면, 이번 신시아 오직의 <숄> 과 <로사> 는 침묵과 삼켜버린 절규가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나치즘의 폭력성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없으나 그 시절 존재했던 이들의 삶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모습을 그 어떤 설명과 묘사보다도 생생하게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문학과지성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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