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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Mar 21. 2023

메시아 서사를 통한 반反 메시아적 메시지

영화 <듄(Dune)>

재작년 개봉했을 때 커뮤에서 덕질하며 정리했던 생각들. 올해 파트 2 가 개봉되기에 그때 쓴 조각글들을 모아 다시금 곱씹어 보고 있다.


원작 <듄(Dune> 의 스포 있음.




사막


생명의 불모지이자 욕망의 집약체인 스파이스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는 아라키스의 사막은 사실 그 안에 물을 품고 있다. 존재만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래벌레는 산소를 만들어내는 존재라 인간들은 모래벌레가 두려워도 함부로 처치할 수 없고, 모래벌레로부터 얻은 투쟁의 조각 성물처럼 다룬다.


프레멘


프레멘은 하코넨에서 아트레이데스로 이름만 바뀐 정복자들로부터 아라키스를 '지키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투쟁이 아라키스에게도 정의일까? 프레멘은 과연 아라키스에게 무해한 존재이기만 할까? 본디 사막에 불과했던 아라키스를 초원으로 바꾸고자 하는 건 인위적 행위. "자연인 아라키스에겐 프레멘조차 타자이다." 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결코 선하기만 한 건 아닐 거라 여겨지는 양가적인 집단. 물론, 작품 내 그 누구도 절대선은 아닐 것이다.


야자나무


프레멘에게 야자나무는 곧 구원이다. 그들은 예언자를 기다리며 야자나무를 심는다. 관념과 피안의 어떤 존재를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이들이 가진 목숨값의 다섯 배라는 야자나무를 스무 그루씩이나 키우며 나무를 신성시하는 프레멘.


나무가 먹고 자라는 물이 누군가의 피이자 생명줄임을 직관적으로 감지한 폴이 "다섯 사람의 생명줄을 희생 삼아 키워지는 것" 이란 소리를 듣자마자 하는 말은 "없애버릴까요?" 그는 그 어떤 이념이나 신화보다도 현존하는 인간을 우선시한다.



메시아


Here I am. Here I remain.

내가 여기 존재하노라.
내가 여기 남아있노라.



배우 오스카 아이작의 애드립이었다는 이 대사에 레토-예수, 폴-사도바울이라는 메타포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예수는 '내가 신의 아들이다, 너희들의 왕이다' 라고 하면서도 그들에게 폭정을 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레토 또한 아카리스 행성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피지배층 대다수를 이루던 프레멘들에게 다가가 '내가 너희들의 군림자가 되려 한다' 라고 하지만, 폭정은커녕 그들과 함께 하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가문을 살릴 쉴드 생성기를 망설임 없이 버리고 지금, 현재 눈앞에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낮은 곳에 있는 이의 손을 잡으러 갔던 레토.


예수를 믿지 못하고 죽인 사람들도 '같은' 유대인들이었듯 레토는 혈족인 사촌에게 죽임을 당한다. 내가 신의 아들로서 여기 있고(Here I am), 육신은 죽어도 신의 아들로서 나는 늘 존재한다(Here I remain)를 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으로 죽어가던 레토. (현재시제는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늘 그러한 불변의 진리를 나타내니까)


<그리스도의 매장>, 카라바조 作


"메시아 왕의 길을 닦는 자"


사도 바울Paul 은 원래 '이방인' 에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 개종하고 순교한 자라고 한다. 그의 업적이라 함은 예수의 말을 신학적 토대로 정리해서 로마 제국 비롯 전 세계에 전파시키는데 공헌했던 것.


이방인이자 (프레멘 입장에서의) 또 다른 압제자였던 폴 아트레이데스가 프레멘들의 입장에 (개종하여) 서며 지도자가 된 것은 우연일까.


아트레이데스 및 프레멘뿐만 아니라 그 외 모두에게도 평화를 주려 왕이 되려 했다는 면에서도, 이방인이라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비롯 외부 세계에도 믿음을 퍼뜨릴 수 있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원작을 통해 생각하자면 폴은 이후 눈이 멀었음에도 폭주하는 아들을 막기 위해 사막에서 설교를 하고 다니지 않나.




관점을 바꾸어 폴이 곧 예수라는 관점도 흥미롭다. 작품 자체가 이슬람 문화에서 차용한 게 많은 것 같기에 예수는 인정하되 선지자(예언자) 중 하나일 뿐 최후의 선지자인 마호메트를 섬기는 이슬람교의 맥락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만약 진짜로 폴이 예수라 한다면, 완전히 같진 않겠지만 레토와 대등한 위치의 (하늘의) 선지자 롤인 것도 같고 레토의 뜻을 따라 뒤를 잇는 (레토의) 선지자인 것 같기도 하다.


메시아 서사를 통한 반反 메시아적 메시지


레토의 두개골을 가지고 피의 성전을 벌였다는 것으로 보아 예수를 믿는 자와 아닌 자의 성전이 일어나겠으나, 그 전쟁을 일으킬지 말지는 폴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부분에서, 작가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고 종교전쟁은 미친 짓이라 생각하면서 인간의 인류애를 향한 의지를 드러낸다.


사실 어떤 선지자건 어떤 종교건 그 목적은 인류의 번영과 존속일 텐데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보면서 외부인(무교인)은 저게 뭐 하는 짓인가 회의감이 들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가 메시아 서사를 통해 반메시아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십자군전쟁 및 지하드jihad 를 위시한 성전이라는 개노답 종교전쟁뿐만 아니라 반기계주의-러다이트운동까지 깡그리 합쳐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궁극적으로 인간은 무엇 속에서 살며 인간 사회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해 이야기하려 한다는 게 매력적이다.



액자식 구성


문제는 내가 폴에게 너무 정이 들었다.


원작에는 역사 일대기처럼 저술하는 이가 있다. 그가 인물 및 앞으로의 일에 대해 평을 내린 다음 챕터가 진행이 되는 셈. 작품이 작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폴을 그린 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특정 등장인물의 입장' 에서 성인聖人 처럼 이상화된 폴이 그려졌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작가는 엔딩에서도 끝을 열어두었고 그러니 독자는 작품을 읽는 내내 한 걸음 물러서서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폴이 죽는 건 가슴 아프나, 반 메시아적 메시지를 통해 메시아를 경계하는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작가의 입장 또한 납득이 간다.


"삶은 우리가 만드는 거야."


도련님 소리 들으며 귀애받고 자랐던 외동아들이자 순진했던 소년이 한순간에 가문이 몰살당하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지키겠다고 각성한다. 우리를 구해줄 메시아라 칭송받았으나 눈이 먼 채 자신이 뿌린 씨의 파국을 막으려 애쓰다 생을 마감한다.


"꿈은 이야깃거리로는 좋지만, 중요한 모든 건 깨어 있을 때 일어나. 깨어 있을 때 삶이 일어나기 때문이지. We make things happen (환경(삶)은 우리가 만들어나갈 수 있어.)" ㅡ 베네 제세릿 같은 거대한 세력이 아무리 개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 해도.


원작 내 궁극의 퀘사츠 헤더락이 된다는 영화 속 던컨의 대사. 원작 덕후인 감독이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가 꿈에 대해, 이상과 같은 종교와 메시아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 현재' 내가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것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던컨 입을 통해 말해주었다고 생각한다.




INSTAGRAM @hppv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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