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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Mar 26. 2023

해방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경기도로 대표되는 비서울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청춘의 절반을 길바닥에 갖다 버리는 슬픔을 아느냐고 울부짖는 3남매의 외침에 인상 깊었던 마음 반, 내성적인 사람을 위한 나라는 없는 듯한 이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공감 반을 느끼며 시작했던 드라마. 작년에 참 재밌게 봤었다.



평범한 인생이 주는 '촌스러움' 과 '쪽팔림' 을 견딜 수 없는 삼 남매와 그런 삼 남매의 아버지를 돕는 비밀스러운 남자 구 씨.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고요한 호수 표면처럼 잔잔하게만 보였던 미정이의 삶이 사실은 지나간 사랑에 관한 증오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는 걸 구 씨가 우연히 알게 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미정이는 그 누구보다 숨 막히는 일상을 탈피하고 싶었지만 가면을 벗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대사는 아무래도 자신을 추앙하라는 미정이의 대사일 텐데, 사실 한 번도 채워진 적 없는 날 위해 당신 스스로를 헌신하여 나를 추앙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무슨 드라마지? 싶어서 귀를 의심했었다. 그렇지만 작품의 후반부를 보고 나면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단어보다 추앙이라는 말이 적합하겠단 생각이 든다.


여하튼,


드라마와 관련하여 인상 깊었던 장면을 딱 세 장면만 꼽아보자면 염미정과 구 씨의 이별 장면, 이별 후 미정의 독백 장면, 그리고 재회 장면이지 싶다. 사실 드라마와 관련하여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메타포는 걷어내고 보이는 그대로만 이야기하고 싶다.




https://youtu.be/A9UHVIEiFI0


자신의 지난 삶으로 인해 미정의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한 구 씨는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겠다 결심하고 미정에게 위악을 떤다. 이별 통보를 듣고 서운하겠지만 화는 나지 않는다고 답하는 미정이에게 구 씨는 '서울' 에 들어가서 '평범하게' 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미정인 평범한 삶에 질식할 것 같아서 구 씨와의 만남을 이어가던 참이었지 않나. 그렇지만 평범이라는 말에 관해 두 사람이 내리는 정의와 기준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니네 오빠 말처럼 끌어야 하는 유모차를 갖고 있는 여자들처럼."
"애는 업을 거야. 당신을 업고 싶어. 한 살짜리 당신을 업고 싶어."



이가 나가도록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그 사람과의 행복한 순간을 꿈꾸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구 씨가 가졌던 평범한 욕망은 뭐였을까. 평범한 어느 다정한 사람이 한 살짜리 구 씨를 업었더라면 구 씨도 남들과 같은 평범한 욕망을 가지며 살지 않았을까.



https://youtu.be/RKuCNi2jJl0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정직하게 보겠다. 나를 떠난 모든 남자들이 불행하길 바랐어. 내가 하찮은 인간인 걸 확인한 인간들은 지구상에서 다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죽어 없어지길 바랐어. 당신이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길 바랄 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 거야.



작품 초반의 미정이는 자신이 만난 새끼들은 다 개새끼라며 분노와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했다. 평범한 척 만났으나 내가 하찮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과 달리 치부를 들키면서 시작된 구 씨와의 관계는 시작부터 껍질처럼 둘러싼 가면을 벗고 시작한 관계였고, 그 덕분에 이별 후에도 한층 더 깊은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이별했다는 슬픔과 자기 연민에 사로 잡혀 애써 행복한 척을 하지도 불행한 척을 하지도 않겠다는 말.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아프지 않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염미정이란 캐릭터가 보여주는 성숙함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https://youtu.be/YSWzOgpk73U


당신 왜 이렇게 예쁘냐.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재회 후에야 지난 과거를 털어놓으며 고해성사하듯 자신이 술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구자경. 이에 미정은 판단하지도 어설프게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저, 당신의 슬픔과 고통을 내게 털어놓는 게 예쁘다고, 그렇지만 그 비통함 털어버리고 이제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웃으며 환대하라는 말을 건네며 웃는다.






나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미정이가 말한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그렇지만 지켜본 사람은 안다. 구 씨를 향한 미정이의 사랑과 환대는 곧 관계로 상처받아 자기혐오로 얼룩졌던 미정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나의 해방일지> 에 기록될 삶에 있어서의 해방은 언제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완결된 그 무언가가 아니라, 늘 진행 중인 삶의 순간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라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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