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진이 고애신에게 "난 노비였소." 라고 말하는 장면, <미스터 션샤인> 이라는 극을 관통하면서도 고애신이라는 인물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 중 하나가 아닐지.
고애신은 최유진에게 악의 없이 아홉 살 아이가 무슨 연유로 그 먼 곳까지 갔느냐,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며 웃으며 물어본다. 최유진에게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아닌 척, 담담한 척 고애신의 앞에 설 수 없음을 말할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는 조선을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도망친 거였기 때문에.
자신을 도망치게 만든 마지막 조선의 모습이 자신의 어미와 자신을 죽이려 든 양반이 지배하던 세상이었으니 그간 고애신에게 느꼈던 감정도 양가감정이었으리라 본다. 사랑하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을 이방인으로 내몬 양반이라는 계층에 속한 사람.
분명 고애신은 악의 없이 어린아이가 왜 그 먼 곳까지 간 거냐 웃으며 이야기했다. 양반가 규수임에도 깨어있는 사람임은 틀림없지만, 사실 자신과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의 형편까지 살필 만큼의 의식의 확장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던 거고, 그 지점에서 고애신 자기 자신도 자기가 속한 계층이 가린 시야의 한계를 인지하고 충격을 받았던 거로 보인다.
마지막 최유진의 대사가 참 좋았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이 말은 고애신에게 또 다른 도전과도 다름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내 가족이 속해 있어서 이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을 넘어, 은연중에 여전히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기존에 살아왔던 세계관(신분제)을 깨부숴야 하는 거였을 테니.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만들어왔던 수많은 '이방인들' 과 '나란히' 걸을 수 있을까.
의식적 한계의 자각으로 말문이 막힌 고애신에게 더는 '나란히' 걸을 수 없을 듯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빙판길 연인의 걸음이 걱정돼 손을 내미는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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