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오늘날의 정치를 '존엄의 정치' 라고 부르며 존엄의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야말로 오늘날의 정치를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정치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전통적 좌우파간의 대립이 아니라 인종, 성, 종교, 민족성을 둘러싼 경합으로 바뀌고 있다.
전통적인 좌우파간의 대립과 승리가 개별자의 인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 거 아닐까. 인터넷을 통한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보편적인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잦아질수록 그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투영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라 생각한다. 그게 성이든 종교든 인종이든 간에. 대의大義 를 위해 미시 파시즘을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이 기존 사회 질서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리하여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라는 감각을 지니고 성차별적인 사회에 의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을 통하여 자기 경험을 해석하고 세계를 설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여전히 각자 위치에서 부당한 사회구조에 대해 치열히 고민하며 존재한다.
살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라는 생각은 늘 하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콕 짚어 설명할 수 없을 때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특히 언제 가장 답답하냐면, 내가 어떤 의견을 내면 나보다 살아온 삶이 더 길다는 이유로 "너는 아직 사회생활이 부족하잖아" 라는 뉘앙스로 내 말을 일축해 버릴 때. 여행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직접 경험이 규정하는 삶과 인식의 지평선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의견을 내면 받아들이기 귀찮아하는 기색이라도 보이지 않았으면 할 때가 있다.
언어화되지 못한 고통들 속에서 문학은 오늘의 금기를 탐색하고, 그 위반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꾼다.
덤블도어는 볼드모트의 이름을 언급하길 꺼려하는 사람들 간의 금기가 깨지길 바랐다. 금기는 곧 힘이고, 금기의 중심에 선 대상은 권력의 중심이 되리란 걸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금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금기란 "본디 언어화되지 않은 무엇이기에 금기를 위반할 수 없는 존재는 창의적일 수 없다" 는 말에는 감탄을 내질렀다. 무언가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현현을 전제로 한다. 언급할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어둠 속에 침잠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두려움의 근원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소아성애와 동물성애의 경우, 솔직히 말하자면 역겹다. 더불어 그들의 사랑을 대변하는 책은 읽을 일이 없을 것 같고, 읽는다 해도 편견 없는 시선으로 읽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일지라도 타인이 가지고 있는 면모의 어느 선까지 수용할 수 있고 눈 감아줄 수 있는가를 스스로 고민해보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금기를 설정하는 것은 권력이고 다수이기에, 그 경계를 건드리거나 넘어서는 존재는 약자와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타자일 수밖에 없다. 타자가 가진 부정성을 배척하고 억누르려는 힘은 곧 금기로 발현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수면 아래의 미지를 우리의 언어로 구체화하고 사유의 대상화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다와다 요코,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한 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아스포라적 작품 세계라니. 덕분에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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