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선 소피에겐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헤어져 있는 부모, 수면 아래 언니 · 오빠들의 비밀스러운 애정 행위,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아빠의 생각, 그리고 캠코더를 끄고 홀로 돌아서 있을 때의 아빠의 마음.
아빠와 단둘이 떠난 튀르키예로의 여행은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의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 이후 태양을 볼 때마다 함께 했던 순간 속 아빠가 가르쳐줬던 다정함을 기억하게 만든다. 함께 할 추억을 위해 고심해서 예약했을 호텔, 햇볕에 타지 말라고 정성껏 발라주던 선크림과 유황 머드, "중요한 거라 반드시 배워야 한다" 며 자신의 부재 동안 딸의 안위를 위해 가르쳐줬던 호신술. 11살 어린 나이여도 어렴풋하게나마 아빠가 돈이 없고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런 삶일지라도 언제든 자신의 삶 한편에 딸의 공간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다정한 아빠.
태양이 보이면,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서툴지만, 함께 하는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딸을 보살피는 캘럼. 그로 인해 소피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환대받고,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빠가 곁에 없어도 아빠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캠코더 기록. '나' 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을 소중하게 담아준 캠코더는, 곧 아빠가 선물한 사랑의 기억이다.
카펫에는 전부 다른 사연이 있대.
햇빛이 부족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아빠. "나한텐 그곳은 과거일 뿐이야. 태어나서 자란 곳을 떠나고 나면 다신 그곳에서 '소속감' 을 느낄 수 없어." 라고 이야기하는 아빠의 사연을 11살 소피는 이해하기 힘들다. 무한한 시간 속 우리 딸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아빠는 장담하지만, 사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라는 말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역설한다. 31살이 되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캘럼은 한 영혼으로서의 구원과 치유를 바라지만, 11살 어린 딸 소피는 태양이 지고 캠코더가 꺼진 뒤 홀로 뒤돌아 흐느끼는 인간 캘럼이 느끼는 슬픔의 심연을 알 수 없다.아빠가 그토록 찾아 헤매나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부족했던 따스한 '햇빛' 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없다.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
I thought that I heard you sing. 그때 '나' 인 소피는 아빠가 노래하고 있다 생각했고, 웃고 있다 생각했고, "내일도 신날까?" 라는 말에 "그럼." 이라고 대답해 주던 아빠를 사랑했다. 자신의 마음은 지옥일지언정 딸에게만큼은 "아빠한텐 뭐든 말해도 돼. 아빠도 다 해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라고이야기해 주던 다정함.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아빠의 나이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알게 된, 해가 진 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삶의 혼란을 감내해야만 했던 캠코더 밖 아빠의 침묵. 검은 파도가 집어삼켰던, 벌거벗겨져 세상에 내던져진, 찢긴 상처로 얼룩진 한 인간의 슬픔.
Aftersun, 해가 진 후 선크림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나 뜨거웠던 태양은 살갗에 흔적을 남긴다. 자신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 칠지라도 '나' 에겐 삶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힘을 선물해 준 아빠. 만약 우리 삶에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밤의 끝자락을 걷고 있는 이들을 보살필 힘을 준다면, '나' 인 소피는 주저하지 않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때의 아빠를 보듬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