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R May 19. 2023

죽어 흙 한 덩이로 돌아갈 뿐인 인생

단편 <흙 한 덩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저


팔 년을 병석에 누워만 있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 스미는 며느리 다미에게 어린 손자와 자신을 두고 떠나지 말라 종용한다. 사실 다미에겐 애당초 그럴 마음이 없었다. 다만 다미는 남편 대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근면성실하게 일한다. 다미의 근면함은 온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 그러나 그런 다미 때문에 온갖 집안일을 떠맡았다 생각하는 스미는 다미에 관한 칭송을 탐탁지 않아 한다. 며느리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며느리가 바깥에서 일하는 까닭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된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다 생각해서였을까. 다미와 스미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어느 날 다미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만다. 스미는 잠시간 홀가분하다 여기며 며느리가 쌓아둔 부를 어떻게 누릴지 고민한다. 그러나 이내 곧 자신을 두고 먼저 가 버린 아들과 다미가, 남은 손자가 한심해진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자신이 누구보다 더 한심해진다.


이 작품 속에는 크게 근대 초기 여성을 둘러싼 두 가지 인습이 보인다. (1) 남편의 사망 후에도 재가를 하지 못하는 여성 다미. 그녀는 남편 사후 남편의 집안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칭송은 다미 개인이 아닌 스미의 며느리, 히로지의 어머니, 니타로의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귀속된다. (2) 평생을 남편 혹은 아들에게 의지해 왔기에 며느리가 없이는 홀로 경제적 자립조차 할 수 없는 여성 스미. 벗어난다고 해봤자 손자의 봉양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스미. 그래서 그녀는 한평생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들 니타로와 며느리 다미, 손자 히로지에 대한 감정이 양가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팔 년 여의 긴 시간을 병환으로 누워만 있어 안타까우면서도 그 기간 동안 죽지도 않고 산 자들을 괴롭힌 거나 마찬가지인 아들. 재가도 하지 않고 죽은 남편 집안의 위신을 높이고 부도 쌓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시모인 자신을 집안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며느리. 며느리 대신 자기를 물심양면으로 봉양해 줄 거라 기대했으나 며느리의 죽음 후 자신이 돌봐야 하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손자.


작품 말미의 "한심하다" 는 말이 어떤 감정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걸까 싶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가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보다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스미의 처지를 적확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 한심하다 : 정도에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딱하거나 기막히다. 


죽어 흙 한 덩이로 돌아갈 뿐인 인생. 단 한 번의 인생이나 그 속에는 너무나 많은 인습의 굴레가 존재한다.




INSTAGRAM @hppvlt

https://www.instagram.com/hppvlt/

매거진의 이전글 급변하는 사회 속 '우울'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