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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목 Apr 06. 2023

커피 한 잔 하고 가 <2부>

커피 한 잔의 역사

 우유부단하고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나는 한 번에 끝낼 일을 두 번, 아니 그 이상 반복해야 할 때가 많다. 건망증 같기도 한 것이 때로 짜증 나기도 하며 자책할 때가 있다.


  "커피 한 잔 하고 가."

 어르신은 벌써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계셨다.

 "아... 제가 얼른 가서 서류를 뽑아야 돼서요..."

 "아 커피 한 잔 하고 가."

 "..."

 "우리 할머니가 시방 아파서 누워있어서 꼴이 아니야."

 나는 커피 한 잔이 곧 30분쯤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얼른 자세를 고쳐 편안한 자세로 커피를 마실 준비를 마쳤다.

 "우리 할머니가 시방 다리가 안 좋아서 누워있어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어르신은 커피잔에 믹스커피를 넣고는 자연스럽게 티스푼을 꺼내 들고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저었다. 투박하고 온갖 고생을 겪어온 손이었다.  어르신이 깔끔한 사람이라는 것을 집으로 들어오면서 알 수 있었듯이 커피를 저은 티스푼은 깨끗이 씻어 제자리에 놓였다.

 "내가 시방은 농사를 안 짓지만 젊은 적엔 윗동네꺼정 짓고 그랬어. 장가는 갔는가?"

 두서없는 어르신의 말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왠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안 갔습니다."

 "장가를 얼른 가서 두 내우(내외)가 지어야(농사) 잘 살지."

 "아... 예."

 "내는 자식덜이 다 나가있어. 큰 애는 강릉가 있고, 둘째는 서울가 있고. 두 내우(내외)가 다 교사야."

 그렇게 어르신의 살아오신 이야기가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어릴 때로 올라갔다가 현재로 돌아왔고 다시 중년을 거쳐 어릴 때로 돌아갔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 이야기, 쌀이 귀해서 항상 배가 고팠던 이야기, 군대를 갔던 이야기...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고생과 아픔, 그리고 배고픔이 있었다. 과연 그런 고생과 아픔, 배고픔을 겪었던 어르신은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몹시 궁금했다. 커피 한 잔 내어 주시는 것으로 보아 한심하거나 안 좋게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저... 어르신 커피 잘 마셨습니다. 얼른 계약서 마치고 들리겠습니다."

 "지나가다가 커피 마시러 와. 커피 값은 안 받으니깐. 허허"

 어르신의 아쉬움의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안녕히 계세요."

 차를 몰아 면사무소로 향한다. 오늘 내로 농지임대계약에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준비해서 농지은행에 제출할 예정이다. 차는 왔던 길을 굽이 굽이 내달린다.

 아뿔싸...'그러면 그렇지. 뭔가 부족했단 말이지...' 논 주인 어르신의 신분증이 필요한데 위임장만 달랑 작성하고 내달렸던 것이다. 늘상 있었던 일이라 그리 대수롭지는 않다.

 "계세요."

 다시 도착한 집 앞에서 어르신을 불러본다. 

 "누구요."

 아까보다는 빨리 어르신이 문을 열었다.

 "아.. 어르신 깜빡하고 어르신 신분증을 안 챙겨가서요."

 "가만히 있어봐."

 어르신은 별말 없이 방 안에서 신분증을 가져와 내밀었다.

 "얼른 면사무소 들렸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려."

 나는 늘 내가 건망증일까 아니면 그냥 꼼꼼하지 않은 우유부단한 성격일까 그것도 아니면 치매의 초기증상일까 의문을 가져본다. 그래서 주의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젊은 놈이 무슨 건망증이냐며 벌써부터 깜빡거리면 어쩔 거냐며 핀잔을 듣곤 한다. 벼베러 가면서 콤바인 칼날을 장착을 안 한 다던지 그래서 40km나 되는 길을 되돌아가고, 돈을 뽑으러 가면서 통장을 안 챙기고, 보조사업을 신청하면서 꼭 서류 한 가지씩을 빼놓고 가서 발길을 돌려야 할 때가 많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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