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눈이 오면, 걱정부터 합니다.
저는 눈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 눈은 낭만이었고 세상을 판타지로 물들이는 마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눈 오는 날은 괜스레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들떠서 항상 친구들과 함께였는데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게 눈은 설렘과 즐거움보다는 걱정과 불안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이 먹으면서, 눈 덕분에 즐거운 경험보다, 눈 때문에 힘들어지는 경험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죠. 눈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특히 이번 겨울에 훨씬 더 확고해졌는데요. 수도권을 휩쓸었던 폭설이 한 몫했습니다.
지난 11월 말, 큰 폭설이 내렸습니다. 뉴스에서는 '117년 만에 최대 폭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냈고요. 제가 사는 지역과 가까운 수원시는 1964년 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다 적설량인 32.3cm를 기록했습니다. 아침에 뉴스를 듣고 깜짝 놀라 밖을 나와보니, 밤새 내린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서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이 날 저는 출근하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평소보다 2시간 이른 6시에 집에서 나와 집 앞 버스정류장까지 걸었습니다. 짐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거리는 4~500미터 남짓 되는데, 가는 동안 세 번이나 넘어졌습니다. 특히 아침 일찍 나오다 보니 제설이 안된 곳이 있어서,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안 되어 고생을 좀 했습니다. 한 번은 인도 턱에 걸려 크게 넘어지기도 했고, 두 어번은 미끄러져 넘어졌는데요. 그렇게 겨우겨우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맙소사! 버스가 안 오는 겁니다. 버스정보 시스템 안내화면에는 모든 버스 노선에 계속 같은 내용만 떠 있었는데요.
예정 없음!!
버스는 포기하고 혹시나 카카오택시를 불렀는데, 세 번 정도 실패하고 결국 오케이! 한 대가 제 콜을 잡고,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5분! 그런데 현실은 20분은 더 기다려서 그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간사한 게 따뜻한 택시 안에 들어오니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몸은 따뜻해졌지만, 택시는 거의 걸어가는 수준으로 속도를 내지 못했는데요. 일단 택시 기사님께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부탁드렸습니다.
택시 안에 앉아, 한숨 고르고, 창밖을 보니 정말 다른 세상이었는데요. 흩날리는 눈발과 그 눈발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 날씨에도 다들 출근은 하는구나...!
생각해 보니, 저도 어떻게든 출근하겠다고 택시 타고 기어가고 있는 건데요. 그 모습을 택시에 편히 앉아서 보니까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은 정말 험난했는데요. 도로 중간중간 아비규환이었습니다. 많은 차들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도로 한복판에 멈추어 서 있고, 그중 일부 차들은 헛바퀴 돌며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사고 난 차량들이 한데 엉켜있기도 했는데요. 다행히도 제가 탄 택시의 베테랑 기사 아저씨 덕분에 저는 전철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요금은 평소라면 8,000원도 안 나오는 거리인데, 거의 20,000원 가까이 나왔어요. 택시 기사님께 정말 감사해서 팁으로 10,000원 더 얹어 드렸습니다.
기사님 덕분에 다행히 출근은 제시간에 맞춰했습니다. 1시간 30분 밖에 안 걸리는 출근 길이 거의 4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출근 시간은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설이 내린 날 안 좋은 기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때 즈음, 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눈 길에 넘어져서 팔 부러졌대!!
청천벽력 같은 연락에 깜짝 놀랐고, 팔에 깁스한 어머니 사진을 보니 더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나마 넘어지시면서 골반 같은 큰 뻐 안 다치신 게 다행이라고 하는데요. 별거 아니라고 날도 안 좋은데 어렵게 오지 말라고 하시는 어머니 말에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폭설이 내린 날, 그날 이후로 저에게 눈은 더 이상 낭만적인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대신 걱정과 불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설 연휴를 시작하며, 또 폭설이 내린 겁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의 명을 받들고, 동생과 명절 음식 재료를 사려고 마트에 가고 있었는데요. 저희가 마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즈음, 갑자기 눈 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금세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발이 거세졌는데요.
명절 전 날이라 마트 주차장에는 차가 굉장히 많았고, 주차장이 실외 주차장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쌓여가는 눈에, 여기저기 차들이 겹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많았습니다. 빵빵대는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면서 순간 주차장이 전쟁통같이 느껴졌는데요. 겨우 마트 안에 들어갔는데, 설상가상 여긴 사람이 더 많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다 모인 듯 사람 멀미가 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적어주신 재료만 얼른 챙겨서 마트를 나왔는데, 내리는 눈발을 뚫고 어머니 댁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어머니댁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저는 지쳐서 쓰러졌고요. 설연휴 2박 3일, 제 집에 가지 못하고 이불속에만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눈 쌓인 밖을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쌓인 눈이 보기도 싫어서 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런 날씨에도 세상을 참 야무지게 돌아가더라고요. 설 연휴 폭설이 시작된 그날, 제 동생은 당근 거래를 두 건이나 하고 들어왔습니다. 이런 날씨라면 날짜나 시간을 미룰 법도 한데, 쿨하게 바로 나가서 거래하고 오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다들 참 부지런히 산다!!
'날씨 핑계 대고 이불속에 들어와 있는 건, 나뿐인가?' 하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폭설에 출근도 하고, 당근 거래도 하고, 엎 집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와서 복도에 쌓인 눈을 쓸고 계신데, 저만 게으르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걸까요?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설렘과 즐거움을 의미했던 눈은 이제 저에게 걱정과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저도 설렘보다는 걱정이 많은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눈 길에서 해맑게 웃고 뛰어다니는 모습보다는, 혹시나 넘어질까 엉거주춤 걷는 모습만 남았습니다. 이제 눈이 오면, 얼마 전 넘어져 다치신 어머니 걱정, 경비 일 하시는 아버지 걱정, 매일 운전해 출퇴근하는 동생 걱정을 먼저 하게 되네요. 평생 저만 생각하는 철없던 저도 눈이 오면 가족부터 생각나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들에게 눈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과 이야기도 댓글로 공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