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죽이기

by 사이글

'합죽이가 됩시다, 합!'

어릴 땐 몰랐는데 합죽이는 치아가 빠져 볼과 입이 들어간 상태로 어감이 좋지 않은 단어였다. 이후로 절대 말하거나 쓰지 않는 단어로 다짐했었는데 설 연휴 동안 합죽이 모드가 되고 싶었다. 여느 때처럼 잠시만 참고 부모님과 놀면 되지만 모난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죄책감과 함께 양해를 구한 뒤 오이도로 1박 2일을 떠났다.


집에서 약 2시간 거리였다. 오이도 종착역까지 가는 버스는 배차가 길어 잠시 카페에 앉았다. 걱정이 많은 편이라 네이버 지도를 다시금 보니 17분 걸린다던 버스는 2 정거장 전이었다. 두 모금 마신 커피와 구겨진 영수증을 치우지도 못하고 다급히 나왔다. 죄책감은 조금 더 짙어졌다. 업데이트된 버스 정류장 안내판에는 11분 전이라고 되어있었다. 내가 인공위성에 속은 건지, 내 눈이 나를 속인 건지 이상했다. 그래도 나보단 인공위성이 정확할 거라며 수면 부족인 상태를 원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한 분과 함께 버스를 탔다. 오이도로 가는 동안 추가 탑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왠지 나 혼자 유령도시로 가는 기분이었다.


오이도 차고지엔 수많은 버스가 모여있었다. 이 중엔 숙소로 바로 가는 버스도 있었지만 여행은 역시 걷기라며 다시금 네이버 지도를 켰다. 숙소까지의 거리는 인도로 1시간이었다. 아까 속았던 기억이 떠올랐고 분명 내 탓이겠거니 했는데, 수면이 부족한 내 머리는 이미 그 기억을 잊었다. 안내받은 시간을 믿지 않았고, 바다 내음이나 맡으며 걷기로 했다. 인도는 국도 바로 옆이라 바다는 커녕 매연으로 가득했다. 줄지은 자동차 행렬 옆에 덩그러니 나 혼자 걷고 있었다. 종종 자전거 무리가 보였으나 휑하니 사라져 나 혼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자동차 안엔 가족들이 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1대당 최소 3명이 있다면 6개의 눈. 줄지은 행렬은 족히 10대 이상의 차. 최소 60개의 눈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소리를 죽이러 가기 전 수많은 소곤소곤 소리가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바다가 가까워졌으리라 예상하며 모자로 귀와 턱을 가렸다. 바다를 풍경으로 오이도 기념공원에 먼저 도착했다. 망망대해의 어두운 한 점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그리고 그 바다 위에 위태롭게 앉은 기러기들이 보였다. 새우깡 던져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날기보단 앉는 걸 선택한 것 같았다. 나름의 전략으로 보였다. 망원경은 지척에서 여러 얕은 파도가 모인 그림을 보여주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소리도 들어보았다. 부드러운 섬섬옥수의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밤바다만이 아니었다.


왼쪽엔 아주 긴 오이도로가 펼쳐졌다. 이곳을 건너가면 숙소로 바로 갈 수 있었다. 바닷바람은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등만은 차가웠다. 이미 땀은 식어가 체온으론 별 수 없었다. 괜히 감기가 두려워져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검은 형체가 보일 때쯤, 검정 패딩으로 돌돌 말아 물멍을 때리는 사람이 있었다. 작은 계단으로 내려가 볼까 고민했지만 내려가지 않았다. 저 사람도 소리 죽이기를 하는 중일 텐데 내가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걸어가 물멍을 때렸다. 갑자기 드라마에서 본 해녀분들의 물숨이 떠올랐다. 나는 육지에 살고 있는데 답답한 물숨이 있었다. 오늘은 물의 근원인 바다가 있으니 멀리 내뱉어도 문제가 없겠다.


등이 더욱 차가워질 때쯤 숙소로 다시 향했다. 숙소로 가까워질수록 나를 보는 눈들은 적어졌다. 그리고 사람도 적어졌다. 오이도는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아무래도 내가 있는 거북섬 주위엔 많이 오진 않은 것 같다. 소리가 죽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숙소 창가로 노을이 지고 있다. 하얀 커튼이 안개 역할을 해서 엄숙해 보이기도 한다. 바다가 때리는 방파제와 여러 모양의 돌들이 보인다. 나는 돌들이 제각각 다른 모양이어서 좋다. 두리뭉실한 돌은 자신의 세상에서만 살지만, 모난 돌은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세상에 부딪혀 본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모양을 갖게 되어 더욱 앞으로 나아간다. 모난 돌들에게 정을 느끼고 눈에 보여서 감사하다. 사실은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