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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토끼 Sep 03. 2020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부모로부터 독립할 때 마음가짐

논문 주제에 자신의 고민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고민이 깊을수록 생각도 깊어지니깐. 나의 대학교 졸업 논문도 그랬다. 주제는 ‘한국적 부모의 영향력이 대학생 자녀의 진로 결정 자율성에 미치는 영향.’ 


당시 내 고민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나는 경제적 독립만 할 수 있다면 심리 상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직업을 가져도 괜찮았다. 당연히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그날도 엄마와 답 없는 통화를 하고 조별 모임 하러 갔다. 4학년만 모인 자리에서 사담은 자연스럽게 진로 고민으로 흘러갔다. 한 팀원은 자신의 친구 얘기를 꺼냈다.     


개가 진짜 가고 싶던 사회적 기업에서 인턴을 했어. 해보니깐 자기랑 정말 잘 맞았데. 회사에서도 정규직 전환을 제안해서 진짜 좋아했는데... 안 갔어.

    왜?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딸 어디 다닌다고 말할 때 단번에 알 수 있는 회사 이름이 아니니깐, 엄마는 그게 싫었던 거지.

    아니, 엄마가 싫어한다고 안가?

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깐 자기가 좋은 스펙을 가질 수 있었던 게 다 부모님 투자 덕분이었다는 거야. 그러니깐 부모님한테 보답해야겠다고 하더라고.

    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왜 탯줄로 발목을 묶어 이인삼각 경기를 하며 살아야 하나. 마침 기사에서는 어느 대학 교수의 어머니가 자식의 자식의 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한다는 내용이 떴다. 자식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여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깊은 곳에서 탄식이 올라왔다.


엄마와의 갈등은 한국적 부모 자녀 관계를 향한 혐오로 번졌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그런 자식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는 암묵적 미덕이 병적으로 보였다. 스무 살이 넘으면 독립된 성인으로 대우하는 서양의 문화가 ‘선’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부모 자녀 관계는 서양의 것과 확실히 구별된다. 서양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해 측은함과 불쌍함이, 반대로 자녀들도 부모에 대해 미안함과 송구함이 크지 않다. 반면 한국의 부모는 자녀가 한 끼만 걸러도 안쓰럽다. 학교 수련회의 클라이막스는 촛불 들고 부모님 떠올리며 눈물 흘리기다.


한국의 부모-자녀관계는 서구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관계와 달리 서로를 한 몸처럼 여긴다. 그래서 서로의 기쁨과 고통은 곧 자신의 것이 된다. 심리학에서 우리나라의 부모, 자녀가 서로를 한 몸처럼 여기는 심리를 부자유친 성정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심리가 자녀의 심리적 독립을 막는 원흉이라고 확신했다. 나의 가설을 논문 주제로 삼고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선행 논문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그러나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건 부자유친 성정이 오히려 자녀의 심리적 발달과 독립을 돕는다는 내용들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죽 치고 앉아 어떻게든 반박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번 읽어 내려갔으나 결국에... 설득되어 버렸다.




잘 의존해야 잘 독립할 수 있다

이 발달의 진리에서 우리나라는 방점을 의존에, 서양은 독립에 두고 있다. 

잘 연결된 상태에서 독립을 장려해야 하는데 한쪽은 너무 의존에만 한쪽은 너무 독립에만 치우쳐져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른 병폐가 있지만 어쨌든 각각의 부모 관계는  그 나라 문화에 적응적이다. 그래서 어느 한쪽의 양육방식만이 옳다고 할 수가 없다.      


부모가 자식을 한 몸처럼 여기는 마음. 그것은 아주 깊은 유대감이다. 깊은 심리적 연결감은 자녀의 독립에 훌륭한 자원이 된다. 내가 다치면 나보다 더 아파해 줄 부모가 옆에 있을 때 아이는 용기를 가지고 기꺼이 다칠 모험을 한다. 나와 깊이 연결된 엄마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끄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 연결감을 부정해버리고 싶었다. 어쨌든 엄마의 다른 방향과 별개로 그 연결 자체는 내 독립의 뿌리였다.      


집단 치유 프로그램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명상 상태에서 선생님의 유도문을 들었다.  

    지금 나는 물에 빠져 있어요.

    나를 구하기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오는 사람은 누군가요?

생각의 여지도 없이 바로 엄마가 물속에 뛰어들었다. 엄마는 나 대신 기꺼이 죽어 줄 사람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깐 다시 울컥했다. 도서관 천장을 바라보며 소매로 눈물을 찍어 댔다.      


엄마로부터 정서적, 정신적 자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가장 원초적인 힘은 확실히 받았다. 엄마가 나를 자신의 목숨처럼 여긴다는 사실이 다른 결핍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나를 길러냈다. 내 뿌리에 감사함을 느끼자 그간 진로 갈등으로 쌓인 원망이 눈물과 함께 흘렀다. 그리고 나를 긍정하는 마음까지 올라왔다.     


법륜 스님은 사람들이 부모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으면 도리어 부모에게 감사해하면서 108배 절을 하라고 한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키운 게 더 지극한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납득되지 않았는데 그때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그때를 계기로 엄마에게 반응하는 내용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다만 강도가 부드러워졌다. 그 이전에는 느낌표를 때려 박으면서 말했다면 이제 물결표를 넣으면서 말한 달까. 나를 자기 몸처럼 여겨서 하는 말이고 그 마음이 내 꽃의 첫 뿌리니깐.      


자신의 첫 뿌리에 감사해 하지만 그곳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 자기만의 꽃을 피워내는데 필요한 다른 양분을 찾아 뿌리를 뻗어 내리는 것. 그것이 자식 된 도리로 가장 잘 사는 길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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