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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토끼 May 31. 2020

이제 내가 네 엄마 할게.

엄마로부터 독립하기


‘나는 엄마의 자랑이다’


고3 때 쓰던 스터디 플래너 맨 앞장에 경건히 쓰여 있는 말이다. 한때 이런 생각으로 공부했다는 게 새롭고 짠하기도 하다. 그 아이는 동시에 엄마로부터 벗어나길 꿈꿨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물리적인 독립은 달성했지만 관계에 변화는 없었다. 몸이 떨어져 있을 때는 애틋한 마음 들다가도 붙어 있으면 알레르기 반응하듯 엄마를 밀쳐냈다. 하지만 싫다고 끝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 않나. 엄마는 미워하면 내가 더 아파지는 사람이다. 이 애증의 끝은 내가 풀어야 할 문제의 시작이었다.     


나를 향한 엄마의 최선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맹점 속에 내 마음에 있었다. 어른의 돌봄과 안내를 받지 못해 성장을 멈춘 어린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내면아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그 아이를 볼 수 없는 엄마에게 내면 아이를 이해 받길 기대하니 답 없는 갈등이 반복 되었다. 독립은 스스로 나 자신의 엄마가 되어주기로 결심했을 때 시작되었다.      






내 안의 부모를 길러내는데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건 ‘내면 아이, 내면 어른’ 이론이다. ‘내면아이 상처 치유하기’라는 책에서 저자는 내면아이의 개념을 확대한다. 내면아이를 치유해야 할 상처의 영역 넘어 우리의 타고난 인격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내면아이는 인격 중에서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부분으로 감정을 우선시하는 ‘직감적인’ 본능을 말한다. 반면 내면 어른은 학습을 통해 발달하는 지성과 행동의 영역이다. 내면 아이와 유대감을 가지면서 성숙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내면어른을 ‘사랑 있는 내면 어른’, 그 반대를 ‘사랑 없는 내면어른’이라고 지칭한다. 사랑있는 내면어른으로 내면아이와 교감할 때 내적 통합과 성장이 일어난다. 그러니깐 감정은 아플때만 돌보고 치유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아이처럼 늘 관심의 대상이다.







우리는 육아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사랑 잘 받고 자란 아이’ 특유의 경이로움과 순수함에 환호한다. 내면에서도 똑같이 사랑 있는 내면 어른이 작동할 때 사랑 받는 내면 아이의 기쁨과 순수성의 꽃핀다. 반면 사랑 없는 내면 어른이 작동 되고 있을 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오는 문제 아이의 모습, 사랑 받지 못한 내면아이의 모습이 드러난다. 즉, 바꿔야 할 건 우리의 내면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반응하고 있는 내면 어른이다. 자신의 내면 어른을 성장 시켜야 한다.     






또 나의 독립에 도움을 준 것은 '자아 분화'라는 개념이다. 자아 분화는 가족 치료의 대표적 학자 보웬이 정의한 개념으로 간략히 말하면 타인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힘이다. 독립의 첫번째 힘은 사고와 정서를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에 화가 났다. 이때 화의 감정에 휩쓸린 체 상대를 바로 공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관계를 끊음으로서 수동적 공격을 할 수 있다. 둘 다 감정에 분리되지 못한 체 행동이 나가는 것이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시킬 수 있다면, ‘지금 내가 화가 났네? 어떤 점에서 화가 났지?’를 감정에서 떨어져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의 자동적 표출이 아닌 ‘네가 한 말이 ~ 하게 들려서 불편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 순간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모습에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그 감정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반응을 하는 모습에 어른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나? 그렇다. 사고와 정서를 분리할 수 있는 것은 내면어른의 존재다. 즉, 자아분화는 내면 아이와 소통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내면어른의 역량을 의미한다.      


자아분화의 또 다른 의미는 자기가 태어난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역시 내면 어른의 역량과 같다. 자신 안의 내면 어른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으면 내면 아이는 밖에 있는 부모님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생각과 감정에 전적으로 노출된다. 내가 물리적,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독립해도 정서적 독립은 여전히 별개였다. 엄마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같이 불안해지고 엄마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는 아이로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상기했다. 


이제 네 엄마는 나야.’ 


내가 내 감정에 전적으로 책임지지기를, 밖의 엄마를 000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바라보기를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팔짱 끼고 있던 손으로 내 패딩을 만지면서 말 했다. “옛날에 너는 한지 같았어. 조그만 손대도 찢어졌는데... 이제는 이런 방수 패딩 재질 같애.” 말 속에 엄마의 대견함이 묻어났다. 엄마로부터 독립을 위해 노력해오면서 오히려 엄마랑 사이가 좋아졌다. 엄마의 말에 상처받은 내면아이로 일일이 반응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으로서 엄마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심리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힘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소통할 수 있는 따뜻한 지성, 내면어른에 있다. 매 순간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알아차려보자.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해주길 원하는지 물어보자. 그것만으로도 사랑있는 내면어른의 훌륭한 시작이다. 보웬은 자아분화 척도에서 100에 해당하는 사람을 예수와 부처로 보았다. 그들 자신의 온전한 부모가 되고 나아가 세상의 아이들을 품었다. 자신의 부모를 길러내는 과정은 평생에 걸친 성장의 길이다. 이제 내 플래너 앞에 이렇게 적어본다. 


내면어른은 나의 자랑이다.’ 


매일 더 사랑있는 내면어른이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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