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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하는 토끼 May 11. 2020

그냥 괴물을 살려두면 안 되는 걸까(1)

심리적 고통을 마주하는 자세



밤새 준비한 발표를 끝냈다. 교수님과 학우들이 수업에서 가장 발표를 잘한 사람으로 나를 뽑았다. 수업이 끝나고 옆에 친구한테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았어? 진짜 솔직하게 어땠어?” 누가 보면 칭찬을 더 듣고 싶어 하는 줄 알겠다. 하지만 그건 우쭐되기보단 자기부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확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평을 듣는 동안 나는 수치심을 견뎌내야 했다. 나를 표현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익숙한 괴물이 나타나 속삭였다. ‘형편없었다고’ 여기에 타당하고 논리적인 피드백 따윈 없다. 그것은 사실과 합리의 빛이 닿지 않는 암흑에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주먹을 번번이 맞는 수밖에 없다.      



내 안의 괴물의 존재를 처음 알아차렸을 때, 나에게만 있는 줄 알았다. 스스로가 문제시되어 더욱 힘들었다. 그러나 누구나 가슴에 그런 괴물 한 마리쯤 키우고 있고 그 크기는 심리적 고통의 강도와 비례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괴물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좋은 사람 몬(다른 사람의 욕구와 감정을 책임져야 해), 1등몬(늘 최고가 되어야 해), 소외 몬(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나는 버림받을 거야) 등의 다양한 종의 괴물들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비합리적 신념, 미해결 과제, 콤플렉스 등으로 부른다.



이 괴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들을 둘로 나뉜다. 괴물을 피하거나 억압하는 사람과 괴물과 친구가 되는 사람. 전자는 내면에 적이 있기에 세상은 늘 도망치거나 싸워야 하는 전쟁터가 된다. 반면 후자는 괴물을 길들여 그것의 지원을 받으며 세상과 교감한다. 사실 심리적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치유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괴물을 죽이려고 상담실을 찾아갔고 지금 그 녀석은 십년지기 친구이다. 고슴도치 같은 녀석의 속살을 만지기까지 숱하게 찔려가며 공부했다. 그러면서 터득한 괴물과 친구가 되는 세 가지 자세가 있다.      





첫 번째, 고통의 원인이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한다.     


상담실에 들어갈 때 이미 문제의 반이 해결되었다는 말이 있다. 고통의 원인이 자기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고3 때 처음 상담받고 나서 주변 몇몇 친구들에게 권유했다.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던 친구들이었고 그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깥을 바꾸려고 했다. A는 자기 부모님 왈 집의 터가 안 좋아서 힘들었던 거라 말하고 이사를 갔다. 예쁜데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던 B는 의느님이, 시험 스트레스로 응급실에 실려 갔던 C는 명문대가 자신들을 구원하리라 믿었다.      



불교에 인연법이라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하에 생겨난다는 말이다. 즉, 고통의 책임을 오롯이 외부 환경에만 돌릴 수 없다. 외부는 내 안의 고통의 씨앗이 피어날 환경을 마련해 준 셈이다. 효과적인 심리치료법인 인지행동치료의 대전제도 우리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책임지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로 훈련이 요구된다. 반면 눈이 밖을 바라보듯 외부를 탓하는 것은 무척 자동적이고 편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속에 있는 고통의 근원은 무시하고 그것이 투영된 세상에 맞서 대처한다. 나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은 궁지 몰러 도저히 고통을 대처할 방도를 못 찾을 때야 비로소 안을 들여다본다.





두 번째,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한다.     


방금 고통을 피할 방도가 도저히 없을 때 속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본질이다. 고통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언가 잘못되고 있으니 봐달라는 신호다. 그렇다고 상담실이나 병원을 찾는 누구나 고통의 원인을 직면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진실을 직면하는데 주체적으로 삶을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교묘히 속이기 쉽다. 흔히는 고통의 책임을 병명에게 돌리는 것이다. “내가 ‘우울증’에 걸려서 그래. 이게 다 ‘우울증’ 때문이야.”

(여기서 심한 정신병은 제외)     



병이 들으면 억울해서 거품 물고 뒤집어질 일이다. 병은 잘못이 없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성실히 일할 뿐이다. 차에 탔는데 안전벨트 안 메면 신호음이 나듯, 고통은 내 안에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의 알람만 없애려 하거나 다른 누군가 해결해주길 기대하지 말자. 신호를 바로 읽자. 바로 ‘내가’ ‘내면의 진실’을 들여다볼 때다. 지금 내 감정과 욕구는 어떤지, 일그러진 논리로 바라보고 있지를 직면해야 한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타인을 헤아려 주지 못할 때, 스스로가 참 싫었다. 마음을 가득 차지한 괴물은 쓸모도 없고 괜히 옆에 있는 사람 다치게 하는 녹슨 고철로 보였다. 절망스러웠던 그때를 전환시켰던 한 생각이었다. 

‘지혜의 연금술을 터득하여 이 고철을 다 금으로 만들자. 

지금 나는 고철이 아니라 금의 재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고통의 원인은 무지다. 그래서 괴물은 성장이 필요한 곳이자 동시에 노다지가 될 곳을 품고 있다.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자 치유에 강력한 추진력을 얻었다.



* 2편에서 계속

https://brunch.co.kr/@hrbara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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