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권이 바꾼 건 계약서 한 줄이 아니다
국내 금융권에서 조용하지만 묵직한 일이 벌어졌다. 한 대형 시중은행이 노후 시스템 교체 프로젝트에 AI를 투입하면서, 계약서에 이런 조건을 명시했다. "AI를 통한 생산성 증가분만큼 사업비를 감액한다."
업계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IT 서비스 시장을 30년 넘게 지배해온 공식이 흔들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맨먼스란 무엇인가
맨먼스(Man-Month), 줄여서 공수(工數). 개발자 한 명이 한 달 동안 일하는 양을 1이라고 치고, 프로젝트 규모를 그 숫자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100명이 10개월 일하면 1,000 맨먼스짜리 프로젝트가 된다. 비용은 단순하다. 맨먼스 × 단가.
이 방식은 반세기 넘게 IT 업계의 기본 문법이었다.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느냐로 대가를 매겼다. 그게 합리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단순하다. 코딩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이었고,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일할수록 더 많은 코드가 나왔으니까.
"수개월이 걸리던 코딩 작업을 AI가 며칠 만에 끝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 AI가 이 전제를 무너뜨렸다. COBOL 언어로 짜인 옛날 코드를 Java로 변환하는 작업, 이른바 C2J는 대규모 인력과 긴 시간이 필요한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작업이었다. AI는 이 작업을 비약적으로 단축시켰다. 그 금융권 계약서의 감액 조건은, 그 현실을 가격에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AI가 효율을 높였다. 좋다. 그러면 그 이득은 누구에게 가는가?
발주처는 말한다. "비용이 줄어야 한다." 수행사는 말한다. "AI 도입 비용과 전문 인력 투자를 인정해달라."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30년간 HR과 조직을 들여다본 내 눈에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기술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생산성은 올라가고, 그 과실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고, 그 싸움 와중에 조직 안에서 정작 중요한 무언가가 조용히 사라진다.
이번 시리즈는 그 "조용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AI가 일을 빠르게 만들 때, 조직은 무엇을 잃는가. 효율이 오를수록 왜 어떤 조직은 더 취약해지는가. 성과관리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다음 화에서는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효율이 올라가는데 왜 조직이 약해지는가 — 그 역설의 구조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 글의 저자는 30년간 대기업 HR 현장을 지켜온 조직·성과관리 전문가다. AI 시대에 조직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현장의 언어로 풀어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