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관리,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숫자가 목표가 되는 순간, 숫자는 거짓말을 시작한다

by 엉뚱이

강의가 끝나고 차장 한 명이 남았다. 대기업 기획팀에서 10년 넘게 일한 사람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팀원들이 보고서를 AI로 뚝딱 만들어 옵니다. 빠르고 깔끔한데... 뭔가 모르게 불안합니다."


표정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블랭크 차트, 요즘도 쓰게 합니까?"

그가 멈췄다.


측정이 목표가 될 때

오래전 기업교육팀에서 일할 때였다. 기획팀이 교육 만족도를 KPI로 잡았다. 그 해 어쩌다 만족도가 4.5가 나왔다. 다음 해 경영진 오더가 떨어졌다. 4.7로 올려라.


황당했다. 교육 만족도라는 건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숫자지, 목표로 세워놓고 달릴 수 있는 게 아니다. 4.7을 만들려면 방법은 뻔하다. 어려운 내용을 빼고, 불편한 피드백을 줄이고, 강사는 분위기 좋은 사람으로 채운다. 만족도는 오른다. 교육은 망가진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한 말이 있다. "어떤 측정치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측정치가 아니다." 굿하트의 법칙이다. 교육 현장에서 그걸 몸으로 배웠다.


AI가 이 구조를 가속한다

블랭크 차트. 빈 종이에 손으로 차트 뼈대를 직접 그리는 것. 어떤 축으로 볼 것인가, 어떤 변수를 나란히 놓을 것인가, 이 숫자는 어디 붙여야 말이 되는가. 생각하고,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그 과정.

"그걸 시키면 요즘 애들이 싫어하죠." 그 차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가 쌓이는지는 끝나고 나서야 안다. AI는 그 씨름을 건너뛰게 해준다. 프롬프트 하나면 뼈대가 나온다. 결과는 나쁘지 않다. 그 대신 뭔가가 생기지 않는다.


성과관리 시스템은 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다. 보고서 건수는 늘었다. 처리 속도는 빨라졌다. 숫자는 좋다. 교육 만족도 4.5처럼.


AI 도입 이후 굿하트의 법칙은 더 빨리, 더 넓게 작동한다. 측정 가능한 아웃풋이 목표가 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AI다. 숫자는 오른다. 그 뒤에서 뭐가 사라지는지는 아무도 재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봐야 하는가

성과관리가 원래 봐야 했던 건 결과물이 아니라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AI 시대에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좁혀진다.


하나. AI가 틀렸을 때 그걸 아는가. 그럴싸한 아웃풋에 눈이 뒤집히지 않고 챌린지할 수 있는가.

둘. AI 없이도 구조를 잡을 수 있는가. 블랭크 차트 앞에 앉혔을 때 버티는가.

셋. 결과물의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가. AI가 왜 이 구조로 잡았는지, 다른 방향은 왜 안 되는지를 본인 언어로 말할 수 있는가.


이건 정량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과관리 시스템이 안 본다. 그래서 사라진다.


나는 그 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AI가 만든 보고서를 검토하는 능력을 평가하세요. 각도를 바꿔 물었을 때 버티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세요. 그리고 가끔은 블랭크 차트를 다시 꺼내세요."


자, 생각해보자. 우리 팀에서, 지금 재고 있는 숫자가 목표가 된 순간은 언제였는가. 그리고 그 순간 이후 무엇이 사라지기 시작했는가.


다음 화에서는 이 '보이지 않는 실력'을 조직 자산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맥락 자산 — 데이터로 잡히지 않는 조직의 진짜 실력에 대하여.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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