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자산

데이터로 잡히지 않는 조직의 실력

by 엉뚱이

고백부터 하겠다.

나도 당했다.

모 그룹에서 강의 개발 의뢰가 들어왔다. IT 컨설팅 수행사 PM들이 발주처의 끝없는 scope 변경과 RFP에도 없는 지시에 번아웃을 겪고 있으니, 고객 소통 역량을 키우는 과정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AI 플랫폼을 열었다. 교육 흐름도, 수업 설계, 교안 초안. 프롬프트를 넣을 때마다 결과물이 쏟아졌다. 구성도 탄탄하고, 용어도 정확하고, 빠진 것도 없어 보였다.


평소 같으면 니즈 분석부터 개발 완료까지 한 달에서 석 달이 걸린다. 그런데 나는 계속 "오케이, 오케이"를 외치고 있었다. 2~3일 만에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뭔가가 걸렸다.


30년이 발동됐다

결과물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손가락으로 짚을 수는 없었다. 그냥 느낌. 현장에서 수백 번 강의를 하면서 몸에 밴 그 느낌.


AI가 제안한 내용 하나하나에 챌린지를 시작했다. "이 순서가 맞나?" "이 활동,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AI는 순순히 수긍했다. 처음엔 그럴듯해 보이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포스트잇 활동이 설계 곳곳에 박혀 있었다. AI 입장에서는 참여형 도구로 무난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멘탈 리허설을 해봤다. 실제 PM들이 앉아있는 교실. 오전에 포스트잇, 오후에 포스트잇, 다음 날 또 포스트잇. 참가자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뻔한 패턴에 지쳐가는 얼굴들.


AI는 그 교실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교실에서 30년을 살았다.

흐름, 내용, 교수 방법. 내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2~3일이 아니라 결국 내 30년이 들어간 것이다.


맥락 자산이란 무엇인가

5화에서 성과관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판단력, 구조적 사고, AI가 틀렸을 때 알아채는 능력.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가. 여기서 온다.


참가자들이 오후 3시에 집중력을 잃는다는 것. 갑을 관계가 얽힌 주제는 역할극보다 사례 분석이 더 안전하다는 것. 포스트잇이 두 번 반복되면 현장 에너지가 떨어진다는 것. 이런 것들은 어떤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다. 논문에도 없고, AI 학습 데이터에도 없다.


수백 번 현장에서 맞닥뜨리며 몸으로 쌓은 것들이다. 이것이 맥락 자산이다.

강의 개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업 베테랑이 고객의 말투 하나로 계약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 생산 현장 숙련공이 기계 소리만으로 이상을 감지하는 것. 오랜 기획자가 보고서의 어느 숫자가 의심스러운지 직감하는 것. 모든 직무에 이런 것들이 있다.


조직은 이걸 자산으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다.

측정이 안 된다. 그러니 관리도 안 된다. 관리가 안 되니 효율화 명목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AI 도입 이후 그 속도가 빨라졌다. 5화에서 말한 굿하트의 법칙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숫자로 안 잡히는 것은 목표가 되지 못하고, 목표가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예산도 자리도 잃는다.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그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된다. 대개는 이미 늦은 시점에.

당신의 조직에서, 지금 측정되지 않아서 관리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조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다음 화에서는 이 맥락 자산이 가장 집중되어 있는 자리를 들여다본다. 요즘 가장 많이 "없애야 한다"는 말을 듣는 그 자리 — AI 피드백은 왜 공허한가.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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