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효율을 원했는데, 둘 다 잃었다
효율의 과실은 누구에게 가는가
어떤 조직이든 일을 맡기는 쪽과 일을 받는 쪽이 있다.
본사와 협력사, 원청과 하청, 기획팀과 실행팀. 명칭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일을 발주하는 쪽(갑)이 기준을 정하고, 일을 수행하는 쪽(을)이 그 기준에 맞춰 결과를 낸다. AI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구조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AI가 그 균형을 흔들고 있다. 그것도 양쪽 모두에게 유리한 방향이 아니라, 묘하게 불리한 방향으로.
같은 단어, 다른 계산
발주사도 효율을 원한다. 수행사도 효율을 원한다. 표면상 목표는 같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계산이 완전히 다르다.
발주사의 효율 = 비용 절감 + 납기 단축
수행사의 효율 = 투자 회수 + 경쟁 우위 확보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서로 다른 언어다. 이 간극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경영의 핵심 요소들이 하나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① 사람 — 숙련이 사라지는 자리
과거에 복잡한 변환 작업은 고통스럽지만 깊은 학습이었다. 레거시 시스템의 논리를 이해해야 했고, 예외 케이스를 하나하나 뜯어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을 '아는' 사람이 만들어졌다.
AI가 그 과정을 대신하면, 결과물은 나오지만 그 결과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남지 않는다. 발주사는 산출물을 얻었지만 그것을 유지할 내부 역량을 키울 기회를 잃었다. 수행사는 납기를 맞췄지만 다음 프로젝트를 이끌 숙련 인력의 성장이 멈췄다.
둘 다 잃었다. 숫자에는 나오지 않는다.
② 자원 — 을은 왜 투자할수록 손해인가
AI가 역량을 상향평준화한다. 웬만한 결과물은 누구나 빠르게 낼 수 있다. 그렇다면 발주사 입장에서는 공급자가 늘어난 것이다. 선택지가 많아졌고, 협상력은 더 강해졌다.
수행사 입장은 반대다. 차별화가 어려워졌다. AI를 잘 쓰는 것이 경쟁 우위였던 시절은 짧다. 모두가 쓰기 시작하면 그건 그냥 기본값이 된다. 기본값에는 프리미엄이 붙지 않는다.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AI 도입에는 비용이 든다. 라이선스, 인프라, 전문 인력 교육, 품질 검증 체계. 이 투자를 수행사가 했는데, 발주사는 결과만 보고 값을 깎는다. 투자할수록 협상력은 오히려 약해지는 구조다.
그러면 합리적 수행사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AI에 깊이 투자하지 않는다. 표면만 갖추고 안을 비운다. 혁신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시장에서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③ 가치 — 보이는 아웃풋과 보이지 않는 과정
scene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강사료가 시간당 몇십만 원이라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 몇 시간을 위해서 몇 달을 씁니다."
교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십 개의 자료를 검토하고, 틀린 방향으로 가봤다가 돌아오고, 현장에서 반응을 보며 고치고, 다시 감수한다. 그 시행착오의 총량이 강의 한 시간에 압축되어 있다. 강단에 서는 한 시간만 보면 비싸 보인다. 그 한 시간 뒤에 있는 수백 시간을 보면 싸다.
요즘은 이런 말도 듣는다. "AI로 교안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과정개발비를 줄여도 된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AI가 만든 교안과 내가 만든 교안의 차이는, 그 뒤에 쌓인 시행착오의 밀도 차이라고.
이 구조는 발주사와 수행사 사이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AI가 단축한 것은 '시간'이지 '가치'가 아닐 수 있다. 하루 만에 나온 결과물이 한 달 걸린 것보다 못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물 뒤에 쌓인 판단력, 경험, 실패의 기억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발주사는 아웃풋의 값만 본다. 수행사는 과정의 값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간격이 지금 업계 전체에서 좁혀지지 않고 있다.
④ 구조 — 계약이 관계를 갉아먹는다
현재의 계약 구조는 AI 이전 시대에 설계됐다. 투입 인력, 공수, 납기. 이 세 축으로 짜인 계약서에 AI의 역할은 어디에도 없다.
AI가 투입되면 이 구조가 삐걱댄다. 공수는 줄었는데 책임 범위는 그대로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에서 오류가 나면 누구 책임인가. 그 AI 도구를 사실상 요구한 발주사인가, 그것을 선택한 수행사인가. 계약서는 침묵한다.
구조가 불명확하면 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쌓이면 관계가 소모된다. 다음 프로젝트에서 진짜 협력이 사라진다. 계약서 한 장이 파트너십을 조용히 갉아먹는 것이다.
⑤ 시스템 — 가격은 맞췄는데 생태계가 병든다
발주사가 비용을 절감하고, 수행사가 마진을 맞추기 위해 인력을 줄이면, 단기 지표는 개선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시장 전체의 건강성이 조금씩 나빠진다.
AI를 표면에만 올리고 내실은 비운 수행사들이 늘어난다. 진짜 실력을 키우는 데 투자하는 곳은 수익을 맞추기 어려워 시장에서 밀려난다. 발주사는 단가를 낮춘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슷비슷한 껍데기들 중에서 선택하는 처지가 된다.
효율을 극대화한 시스템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잘 작동한다. 그리고 예외적 상황에서 가장 빨리 무너진다. 껍데기만 남은 공급망은 위기 앞에서 버티지 못한다.
테이블 위와 테이블 밖
발주사와 수행사는 지금 협상 테이블에서 공수와 비용을 놓고 싸우고 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들은 테이블 밖에 있다.
사람의 성장, 보이지 않는 과정의 가치, 계약 구조의 재설계, 시장 생태계의 지속가능성. 이것들은 숫자로 잡히지 않아서 협상 안건이 되지 못한다.
테이블 밖에 있는 것들이 무너질 때, 테이블 위의 숫자도 결국 흔들린다.
당신의 조직은 지금 무엇의 값을 매기고 있는가. 그리고 값이 매겨지지 않는 것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음 화에서는 이 구조 안에서 성과관리가 왜 오작동하는지를 들여다본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
#이 글의 저자는 30년간 대기업 HR 현장을 지켜온 조직·성과관리 전문가다. AI 시대에 조직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현장의 언어로 풀어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