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의 함정

시행착오가 사라진 조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by 엉뚱이

버려진 자료들이 사라졌다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다. 마주하는 용기(2023). 기획 단계에서 나는 관련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논문, 기사, 보고서, 인터뷰 녹취, 심지어 SNS 게시물까지. 그 중 실제로 책에 들어간 건 아마 10%도 안 됐을 것이다. 나머지 90%는 '불채택 자료'로 폴더 어딘가에 잠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몇 년 뒤, 전혀 다른 주제로 강의를 준비하다가 그때 버렸던 자료 하나가 머릿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당시엔 책에 쓸 수 없어서 덮어뒀던 내용이었다. 그게 강의의 핵심 사례가 됐다.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 자료를 검토하던 과정, 고민하던 흔적이 뇌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효율적으로 검토했다면, 그 자료는 처음부터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효율이 놓치는 것

AI 보조 도구를 써본 사람이라면 안다. 빠르다. 정확도도 나쁘지 않다. 수십 개의 문서를 훑고, 핵심을 추려주고, 적절한 수준의 아웃풋을 내놓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공기 중으로 날아간다.


AI는 '관련 없는 것'을 걸러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필터링이 곧 효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학습은 종종 그 '관련 없는 것'에서 시작된다. 길을 잃어야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예상치 못한 연결이 생긴다. 시행착오(trial and error)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그 자체가 지적 자산이다.


필터버블의 조직판

나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일부러 흐뜨린다.

평소 관심도 없는 엉뚱한 주제를 의도적으로 검색한다. 취향이 아닌 영상을 억지로 틀어놓기도 한다. 그러면 알고리즘이 잠깐 헷갈린다. 그 틈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들어온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다가, 나중에 전혀 무관해 보였던 그 조각이 다른 생각과 연결되는 순간이 온다.


비효율적 탐색이 만들어내는 우연한 연결, 이것을 영어로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부른다. 그리고 조직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AI가 업무에 본격 투입되면, 조직의 정보 흐름도 최적화된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가, 필요한 순간에 전달된다. 효율적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엿듣는 대화',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회의', '업무와 관계없는 잡담'이 줄어든다. 조직의 필터버블이 강해진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효율이 오르고 있으니까.


scene

몇 년 전, 내가 컨설팅으로 들어갔던 한 제조업체 이야기다. 그 회사는 ERP를 전면 도입하면서 비공식 보고 채널을 모두 없앴다.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줄이겠다"는 논리였다. 1년 뒤 생산성 지표는 올라갔다. 그런데 현장 팀장들이 이상한 말을 했다. "예전엔 담배 피우다가 다른 팀 얘기 들으면서 문제를 미리 알았는데, 이제는 다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고.


비공식 채널이 사라지자, 문제의 조기 감지 능력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효율적 학습'이라는 모순어법

학습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다.

읽다가 딴생각을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보다가 되돌아오고, 필요도 없는 책을 끝까지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핵심을 건진다. 이 과정 전체가 학습이다. AI가 "이 책에서 핵심은 이것입니다"라고 요약해줄 때, 그건 결과물은 전달하지만 학습 과정은 생략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신입사원이 무의미해 보이는 서류 정리를 하다가 업무 흐름을 몸으로 익히고, 허탕을 치며 돌아다니다가 사람과 관계를 만든다. 선배의 실수를 옆에서 지켜보며 암묵지를 흡수한다. 이 모든 과정을 AI가 효율화할 때, 조직은 단기 성과는 오르지만 장기 회복력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효율의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

당신의 조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AI 도입 이후 당신의 팀에서 '우연한 대화'가 줄었는가. 신입이 실수할 기회가 줄었는가. 보고서가 빨라졌지만 왜 그 결론이 나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줄었는가.


효율이 올라가고 있다면, 동시에 이 질문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학습하지 않고 있는가.


다음 화에서는 이 구조가 발주사와 수행사 사이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다룬다. 효율을 요구하는 쪽과 효율을 제공해야 하는 쪽, 그 사이에서 진짜 비용은 어디로 가는가.


#이 글의 저자는 30년간 대기업 HR 현장을 지켜온 조직·성과관리 전문가다. AI 시대에 조직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현장의 언어로 풀어쓴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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