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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뚱이 Aug 06. 2020

리더의 언어

- 언어 아닌 것이 언어를 대신할 수 있다.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과목은 국어. 그것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홀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를 쓰는 낭만적인 섬마을 선생님. 지금 생각하면 다소 청승맞은 상상이지만 그땐 정말 진지했었다. 그래서인지 사춘기 시절 내내 국어를 가르치는 은사님들은 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여러 국어 선생님이 계셨지만, 그중 중학교 시절의 두 분이 생각난다.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때 별명이 놀부였던 뚱뚱한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2학년 때 만났던 키가 정말 작은 땅딸보 선생님이다. 두 분 다 열정적이셨고, 당시 문예반의 꼬맹이 작가였던 나를 특별히 귀여워해 주셨다.


그러나, 두 분에 대한 마지막 인상은 각각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한 분은 호의적으로, 또 다른 한 분은 안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된다. 이제, 그 기억의 보따리를 풀면서 리더의 언어에 대해 고민해보려 한다.




어느 날이었다.  놀부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다. 자기 꿈에 대해서 정리하고 발표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나는 열심히 원고를 썼고, 발표 마무리에 선생님 같은 국어 교사가 나의 꿈이라고 하자 매우 흡족해하시며 따로 교무실로 부르셨다. 선생님은 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대체로 언어에 강점이 있기 때문에 영어나 제2외국어도 잘할 거라며 공부 열심히 해서 꼭 꿈을 이루라고 격려해주셨다. 


교무실을 나가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누군가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용기백배해서 몰입하는 나의 성격 때문에 그날부터 나의 책상의 대부분은 빨간색 원고지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날은 학교 체육관에서 전교생이 모여 어떤 기념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앞 줄의 학생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았던 나의 목소리가 체육관 한편 구석에서 카랑카랑 울렸다. 한창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갑자기 나의 목덜미를 낚아채면서 따귀를 한 대 냅다 내갈기는 것이었다. 억! 나는 뺨을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눈물을 그렁그렁 가득 담고 쳐다보니, 놀부 선생님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

"너같이 질서를 무시하는 놈은 사회에 나가면 큰 일 저지를 게야"


나는 억울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자초지종도 따지지 않고 혼을 내는 선생님이 미웠고, 하필이면 그 선생님이 내가 제일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어서 더 미웠다. 게다가, 실랑이의 원인을 제공했던 앞 줄의 학생은 놔두고 나만 혼났다는 사실은 어린 나의 감성에 더 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내었다.


그날 이후, 국어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책상은 원고지 대신에 다른 것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성적 하강곡선은 2학년 국어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쭉 이어졌다.


80년대 당시에는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다양한 교내외 백일장이 열리곤 했다. 나는 2학년이 되자 교내 백일장에 동시 한 편을 출품하였는데 우연찮게 입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2학년 땅딸보 국어 선생님은 그 동시를 가져와 급우들 앞에서 직접 낭송해주시면서 보기 드문 순수하고 맑은 시라고 칭찬하셨다. 


이후 내 책상 위는 다시 빨간 원고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매주 나는 습작시와 소설을 써서 선생님에게 자랑스럽게 보여드렸는데, 선생님은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짬을 내어 원고를 끝까지 읽어주셨고, 늘 격려해주셨다. 이후, 나의 국어 성적은 물론 전체 성적이 다시 상위 급 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교생이 모인 월례 조회였는데, 평소 우리가 대머리 선생님이라 놀려댔던 미술 선생님이 그날 정년퇴임식을 하셨다. 준비한 퇴임사를 무거운 어조로 읽어나갔던 선생님은 4.19 혁명 당시, 제자들이 거리로 나가서 경찰의 총칼에 희생된 대목에서 우셨다. 그러면서 어린 우리에게 '사회 정의'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퇴임사를 끝맺었다. 


나는 전율을 느꼈다. 아직 솜털이 보숭보숭한 아기 같은 중학생들이 데모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니... 이 내용을 글로 한 번 써보리라 결심했다. 주말을 꼬박 새우며 원고를 써서 일주일 뒤에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네가 정의에 대해서 눈을 떴구나. 울분이 잘 느껴지는 글이네...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구나. 시대가 하도 험해서 아직은 정치적인 글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스스로 판단할 때까지 이 글은 유보했으면 해"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면서 손을 꼭 쥐어주셨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선생님이 왜 원고를 거부하고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스레 꽉 쥐셨던 나의 손을...




리더는 인플루언서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인플루언서의 언어이다. 리더의 말 한마디, 누군가는 그것을 집에까지 갖고 가서 즐거워할 것이고, 어떤 이는 밤새 되씹으며 괴로워할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그의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제 리더들은 바빠진다. '말 잘하는 방법', '화법 업그레이드' '소통하는 방법' 등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책과 강의, 유튜브 동영상을 봐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개의 리더들은 지금도 충분히 말을 잘한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이미 리더의 역할뿐 아니라 팔로워의 역할(조리 있게 이야기를 해야만 살아남는)을 충분히 수행했을 테니까.


리더의 언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뢰를 주라는 이야기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의 북부군 총사령관인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말없이 부하들과 눈빛을 교환하는 장면을 보라. 어떤 경우에는 이처럼 말을 하지 않고도 부하들에게 신뢰의 언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리더들이여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찾으려 밖으로 나다니지 말지어다. 


모든 리더의 언어는 리더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내재되어있으므로!



- 8월 둘째 주, 용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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