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forecasting 역량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우리는 바르샤바에서 유럽횡단 열차를 타고 프라하로 떠났다. 큰아들과 나는 2층 침대칸으로 배정받았는데, 실내가 매우 어둡고 남루하여 마치 구 소련 작가 솔제니친의 작품에 나오는 시베리아 수용소 분위기였다. 하지만, 곧 따뜻한 담요와 기내식이 제공되고, 친절한 승무원의 안내로 우리는 그럭저럭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눈을 뜨자 거대한 회색빛 철도역이 다가왔다. 프라하 역이다. '동유럽의 보석' 프라하는 우리에게 전도연과 고 김주혁이 열연한 '프라하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낭만의 도시이지만, 1968년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Pražské jaro 프라슈스케 야로)'사건이 발생하였던, 가슴 아픈 도시이기도 하다.
역을 나서자마자 나를 당혹게 한 것은 거리 바닥이었다. 곳곳에 가래침부터 다 쓴 휴지, 심지어는 오물까지 널려 있어, 이곳이 TV에서 본 그 로맨틱한 도시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역 주변을 벗어나자 다시 깨끗한 보도가 나왔다. (알고 보니 역 인근 길바닥이 지저분한 이유는 주변에 노숙자가 많기 때문이라 한다)
먼저 우리가 묵어야 할 숙소로 가야 하는데 가이드가 따로 없어서 우리 스스로 알아서 방향을 잡아야 했다. 김이곤 감독님이 이번에는 나보고 인솔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떨떠름했지만, 스마트폰의 구글 맵이 있으니 못할 것 없지 싶어 쉽게 응락했는데, 이것이 실수였다.
-여기가 아닌가 봐... 절로 한번 가봅시다... 아, 여기도 아니네. 이번에는 이쪽으로 한 번 가보시죠. 에구구 막힌 골목이네... 아까 거기인 모양이네요.
안타깝게도 구글 맵은 처음에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었으나, 꺾어지는 길에서 자꾸 경로를 바꾸었다.
어설픈 인솔자를 따르는 그룹 멤버들은 점차 짜증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 추운 날씨에 나의 등은 점차 식은땀 범벅이 되어갔다. 한 시간 넘어서도 계속 헤매던 나는 결국 두 손 두 발 모두 들었고, 일행 중 아날로그 맵을 가져오신 분에게 리더 역할을 넘기고야 말았다.
독도법을 익히신 그분의 뛰어난 령도(?)로 우리는 간신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저녁 모임에서 김 감독님이 빙긋 웃으시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 어떠세요 체코에서의 첫날? 저는 원장님이 마치 추운 겨울날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는 몽골 대장군 같더라고요... 힛힛힛"
유쾌하게 나의 실수를 감싸주려는 감독님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놈의 구글 맵 때문인데... 하는 억울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구글 맵이던 네이버 맵이던 아무리 첨단 AI 엔진이 탑재된 네비라 하더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과거 데이터에 의존하는 이상 현재 상태를 즉각 반영할 수는 없기에 경로 오류는 늘 있을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지도 위에 나와있는 목적지를 기준으로 내가 어디에 위치해있고 어느 경로가 빠른지에 대한 Micro 한 데이터 분석력과 Macro 한 예측력에 달려있다. 즉, 사이버 맵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머릿속에서 전체 지도를 조망하며 현재 눈에 들어오는 도로들과 대조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도 없이 나는 그냥 무턱대고 구글 맵이 왼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오른쪽으로 갔으니, 그룹 멤버들의 소중한 시간을 엄청나게 까먹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몽골 대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듣기엔 좋은 것 같은데, 내용을 알고 보면 무턱대고 Go! 를 외치는 무대뽀 장군이라는 비꼼 의미가 살짝 숨겨져 있는... 머리 크기가 대두여서 더 잘 어울리는...(ㅜㅜ)
사람들은 체코의 유명한 음악가 하면 드보르작을 많이 떠올리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의 조국'을 작곡한 스메타나를 좋아한다.(참고 : 스메타나의 국적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그의 생전에는 '체코'라는 나라는 없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포함된 보헤미아에 속했음)
'나의 조국'은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연작 교향시로서 19 세기 들어 유럽 각국에 몰아친 민족국가 수립 당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킨 곡으로 두 번째 곡인 블타바(독일어로는 몰다우)가 특히 듣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우리는 먼저 중세시대 말기에 제작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라하 천문시계'(Pražský orloj 프라시스 키 오를로이[praʃskiː orloj])를 방문한 뒤, 블타바 강으로 갔다. 날씨는 말 그대로 청명했는데, 백조와 수달이 노니는 블타바 강가에서 누군가 틀어놓은 스메타나 '나의 조국_블타바'를 들으니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프란츠 카프카 뮤지엄를 가볍게 들른 후,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를교(Karlův most)로 이동했다. 이 다리는 14세기경 카를 4세의 통치 아래 135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402년에 완성되었다.(위키백과 참조) 카를 4세는 보헤미아 국왕이었을 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이탈리아 왕, 룩셈부르크 백작 등을 겸임했다. 당시 체코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왕이었던 것이다. 우리로 치면 광개토 대왕 정도 되지 않았을까.
나중에 체코에 있었던 날들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자료를 찾아보니 14세기 카를 4세 국왕부터 스메타나에 이르기까지 보헤미안들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낭만적 자유인 이미지보다는 전략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전체를 보면서 동시에 디테일을 생각하고, 가능한 대안들을 모두 생각하면서도 우선순위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능력이 아닌가.
카를 4세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루트비히 4세)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교황 클레멘스 6세와 전략적 동맹을 맺고 강력한 협상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여러 나라의 국왕 자리에 올랐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중앙유럽 최초의 대학교(프라하 카렐 대학교)와 신시가지인 노베 메스토도 건설하는 등 중세 시절 유럽의 리더로서 출중한 전략적 역량을 지녔다. 이 모든 것은 리더로서 확신에 찬 예측력(Forecasting)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사실, 현대의 조직에서 제일 황당한 리더가 이 Forecasting 능력이 미흡한 리더들이다. 이 리더가 이끄는 그룹은 팔다리 고생이 뻔히 보일 것이다. 리더가 열심히 하라는 대로 했지만, 아무래도 이 산이 아닌가 봐... 저 산이 맞나 봐 하며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리고 이유 없이 중요한 정책을 시도 때도 없이 바꿔버리는 통에 팔로워들은 사기가 저하되고 일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기실, 이러한 Forecasting 역량은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과거의 추세 및 이슈의 해결 사례들을 분석해서 '큰 패턴'을 생성하고 그 흐름을 직시하게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되는 역량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다양한 요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과 현재의 트렌드를 놓치지말고 공부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사유도 학습도 하지않는 리더들은 당연히 이 역량이 미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리더일까? 프라하 역에서 불명예스러운 몽골 대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처럼, 전략적 사유 없이 직관이 시키는 대로 팔로워들을 이리저리 몰아세우는 리더는 아닐까... 한국에서 건너온 볼품없는 리더는 유럽의 보헤미아 평야에서 자숙의 시간을 가지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2년 전의 동유럽 여행을 상기하며 9월 첫째 주, 용모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