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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대시를 받았어요

- 50 중반에 쓰는 신혼일기, 에피소드 # 1

by 엉뚱이

"나, 대시받았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대꾸도 않고 스마트폰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켠 아내가 "나도 아직 살아있어~~ 랄라" 하며 계속 흥얼거리는 게 아닌가.


"흥, 듣기 좋으라고 누군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겠지..." 시큰둥한 나와는 달리, 알딸딸하게 볼이 달아오른 아내가 신나게 말을 이어간다. "흥! 그게 아니라고~"


며칠 전 볼링장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자꾸 자기에게 눈길을 주던 남자 볼러 한 명이 슬며시 다가와 빵 봉지를 테이블에 놓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자 볼러들도 많이 있는데, 꼭 찝어서 아내만 먹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뭐라? 이런 쳐 죽일... 갑자기 혈압이 솟아오른다. 동시에 평소 알고 지내던 남자 볼러 수십 명의 얼굴들이 단 0.5초 만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럴 "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마누라의 수작일 거야... 요즘 우리 관계가 심심하고 무덤덤해지니까 몸값 올리려고... 헹.


"그놈이 미쳤나 부지... 아니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던가" 중얼거리는 나의 말을 질끈 밟으며, 아내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실, 나한테 눈 길주는 남자 볼러가 몇 명 더 있어..."

"..."


흠... 이 정도면 아무래도 갱년기 증상에 정신착란 증세를 추가해야 할 듯싶다. 어쨌건 말을 더 들어보았다.


아내에게 빵을 선물한 빵돌이 볼러는 한 달쯤 전에 처음 볼링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하필 그날이 볼링장에 사람들이 넘쳐 같은 레인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볼링이라는 스포츠 특성상 매너로 박수도 치고, 눈인사도 해서 어쩔 수 없이 안면을 텄다는 것이다.


이후, 아내는 별 생각이 없이 평소처럼 계속 연습볼을 치러나갔는데, 그가 계속 아는 체하며 눈인사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간 나면 같이 치러온 '패거리'들과 점심을 먹자는 둥 여러 경로로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여러 사람 앞에서 보란 듯이 빵을 선물한 것이었다.


으음... 사건 전말을 대충 들으니 나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진짜네... 가만두면 안 될 놈팽이로군.

"어이, 아짐. 나 내일 연차 낼 건데... 올만에 볼이나 치러갈까? 판당 10만 원!" "응? 내일 출장이잖아? 웬 연차?"

"엉, 아... 미팅이 오후로 연기되었어, 오전 반차냈어"

"나야 좋지..."

"내일 그 빵돌이도 오는감?" 슬쩍 떠본다.

"아마도...ㅎ"


이런 제길... 기다리고 있는 거 아녀? 이불을 둘러쓰면서 아내를 노려 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6번째 캔을 꺼내 혼자 폭탄주를 말고 있었다. 시시덕거리면서. (음... 대충 짜증)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될 수 있는 대로 험악하게 보여야 한다. 흠... 칼로 얼굴을 좀 째?(옥같은 내 얼굴을? 그건 안되지) 담뱃불로 팔목을 살짝 지져? (그건 뜨거울 거야, 안돼)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우선, 머리를 가위로 짧게 다듬고 모히칸식으로 세웠다. 밤새 자란 수염은 깎지 않고 터프하게 놔뒀다.


거울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며 혼자 이 표정 저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아내가 아침부터 뭔 지랄하고 있냐고 구시렁거린다. 아니 뭐... 담주 강의 있는데, 강사의 표정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어서 말야...얼버무리며 다시 서비스맨의 얼굴로 돌아와 활짝 웃어 보였다.


볼링장은 보통 오전 10시에 오픈하여 새벽 3시에 클로징 한다. 그리고 오픈 전에 밤새 흐트러진 레인을 정비하기 위하여 기계로 클렌징하고 기름을 다시 입힌다. 볼링 동호회 회원들은 정비 후 플레이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10시 ~ 11시쯤 모여 연습하거나, 아예 저녁 정비 시간인 오후 6시 이후에 모이곤 한다.


우리는 11시 반쯤 도착해서 몸풀기 운동부터 시작했다. 볼링은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한참 동안 허공에 볼 던지는 연습을 하였다. 아내도 허리를 쭉 펴며 연습을 시작하였다. 아직 미끈한 몸매다. 둘 다 볼링 에버는 200점 내외지만 아내는 꿋꿋하게 여자 핸디 10점을 주장하기 때문에 잘못 치면 몇 십만 원의 군자금이 한꺼번에 날아간다. 긴장해야 한다.


첫 게임은 211점 대 190점으로 가볍게 승... 10만 입금 완료!(ㅎㅎ) 두 번째 게임은 210점 대 201점으로 여자 핸디 10점 합하니 1점 차이로 석패... 다시 10만 출금(ㅜㅜ)...


세 번째 게임 첫 프레임을 스트라이크로 잡고 나오는 순간, 아내가 눈짓을 한다. (뭐여... 그놈이여?) 볼링장에 막 들어온 한 무리의 사내들.


드디어 빵돌이가 출현한 것 같다. 그런데 세 명 정도가 같이 왔다. 어느 넘인가? 대답은 않고 아내가 슬쩍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킨다. 흠... 저 넘이고만. 빵돌이답게 볼탱이가 빵빵하네.


거구였다. 최소한 나보다 30킬로는 더 나가 보이고 키도 훌쩍 컸다. 게다가 비스무리한 놈팽이들 합이 세 명이다. 어? 이거 페어 하지 않은데? 된장헐~


당황한 나는 물먹으러 가면서 일단 무리를 이리 훑어보고 저리 훑어보았다. 특히 빵돌이 근처를 지날 때는 강력한 눈 레이저를 쏘았다(?) 느닷없이 나의 눈총을 받은 녀석은 '왜 날 쳐다봄?'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맞받았다. 복장을 보니, 그들은 전문 볼러들은 아닌 것 같고 가끔 즐기러 오는 일반인 볼러들 같았다. 뭐 어쨌든.


으음... 어쩐다? 내가 이 뇨자 남푠이닷! 어디서 감히 대시를 해!! 이렇게 세게 나가?

아님, 점잖게... 제가 OO 씨 남편 되는 사람이올시다. 반갑소! 악수나 합시다! 하면서 아내가 품절녀라는 것을 살짝 암시해?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빵돌이가 문득 고개를 내게 돌리는 것이었다.


잠깐 살펴보니 볼링 카운터 보는 알바 김 여사가 아내와 함께 있는 나를 가리키면서 빵돌이에게 뭐라 속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빵돌이... 나 있는 쪽을 쳐다본다.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다시 챙기더니, 게임도 하지 않고 바로 일어섰다. 뭐지?


그때 콰쾅! 소리와 함께 아내의 포베가(스트라이크 연속 네 번) 포인트가 전광판을 장식했다. "호호, 내가 20점 앞섰어!" 아내와 내가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빵돌이가 눈에 슬쩍 비쳤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로 쓸쓸히 향하는 그의 발걸음... 왠지 무거워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통쾌해야 될 내 마음도 다소 무거워졌다. 왜지?




빵돌이는 사랑과 함께 좌절감을 느꼈을 터였다. 나는 그에 대한 질투, 분노를 느끼면서 동시에 연민을 느꼈다. 아내는 뭘 느꼈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이토록 복잡하고 힘든 감정이다. 어쩌면 그것은 양날의 검일지 모른다. 칼 앞날에서는 상대방을 향한 끝없는 베풂과 끌림이 있는 반면 칼의 뒷날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과 실망이 있다. 우리 셋은 그날 번쩍거리는 사랑의 검에 가차 없이 휘둘렸던 것. 지면을 빌어 그분에게 거꾸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어 고맙다. 어쩐지 갱년기 50을 막 넘은 아내가 새 신부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50 중반의 신혼일기'라는 제목의 브런치 콘텐츠를 진행코자 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사랑 이야기이다. 우리 부부는 IMF 시대에 결혼하여 나름 가슴 짠하고 힘든 시기를 같이 극복해왔다. 아이들이 대학교를 가고 어느 정도 성장했다 싶어 돌아보니 부부의 나이도 50대이다. 제대로 된 신혼 기간을 보내지 못해 아내에게 늘 미안했던 필자의 마음을 담아 50여 회 정도로 연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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