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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J 신랑과 ISTP 신부 #2

by 엉뚱이

"혼자 고치고, 혼자 여행 잘 가셔~"


신혼여행을 하루 앞두고 일은 벌어졌다. 신혼집 보일러가 털털 거리며 신통치 않은 것 같아, 보일러를 고치고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황홀한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IMF로 인하여 겨우 전국 일주 여행으로 계획해야만 했던 1998 신혼여행... 그런데, 보일러 수리로 하루를 까먹고 가자고?


잇팁 신부는 바로 떠났다... 여행지가 아닌 자기 친정집으로~~ 으윽!


엔프제는 뭔가 걸리적거리는 게 있으면 바로 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 잇팁들은 걍 뭐 어찌 되겠지...하며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제 일의 결과를 놓고 보면, 엔프제의 안달복달에 비해 잇팁들의 느긋함이 더 나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아내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시간이 없으면 없는 대로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며 늘 만만디이다. 그런데도 어쨌건 일은 잘 돌아가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가끔 목이 뻐근해서 이리저리 뚜뚝뚜뚝 돌려주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게 아예 습관처럼 되어 아침에 일어나면 일부러 온몸의 관절을 그냥 우두둑거리곤 했다. 그렇게 신나게 목 돌리기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목뼈 있는 쪽이 너무 아파왔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목을 뒤로도 옆으로도 제끼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 이거 뭔 일 났는가베...마눌"


나는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혀를 차는 아내와 우선 정형외과를 찾았다. 이것저것 검사가 끝나고, 담당 의사 샘은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목 수술을 권하였다. 헉! 목에 철심을 박아야 한다나...


집에 와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목 관절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되면 구두도 못 신고 하늘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등등 결국 장애인이 된다고 하였다. 아, 이게 웬일이람... 내가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다니. 기분이 꿀꿀해진 나는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계속 찾아보았다. (그 와중에 한심하게도 내가 제일 많이 찾은 자료는...장애인 복지 혜택으로 차를 살 수 있다는 정보에, LPG 차 검색이었다... 어이구!)


그러다가 어떤 병원의 광고에 눈이 갔다. 강남에 있는 한방 병원이었는데 그곳은 디스크를 무수술로 낫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아내의 손을 끌고 달려갔다. 뭐 여기서도 이것저것 한참 검사한 뒤 한의사 샘의 진단이 내려졌다. 3개월 침 치료와 인대 복구용 탕약 처방...


그런데 치료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면 되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탕약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바람에 한 달 치료비에만 무려 1백만 원이 넘었다. 나는 당시 대리 직급에 한 달 봉급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던 시절이어서 너무 부담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엔프제 신랑의 땅 꺼지는 걱정이 시작되었다. 내가 생활비를 다 잡아먹으면 두 아이 녀석 분유값은 누가 주냐고... 아슬아슬하게 이번 달도 적자를 면하도록 계획을 잡아놓았는데. ㅜㅜ


그런데 잇팁 신부는 여전히 희희낙락한다. 뭐 어찌 되겠지 하면서...

진짜 요즘 애들말로 아내가 개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세 달 치료비로 3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드는데 ㅜㅜ


뒤숭숭한 마음으로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강변북로 건대 부근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쿵~소리와 함께 핸들이 마구 흔들렸다. 추돌사고였다. 나는 간신히 브레이크로 중심을 잡고 차를 갓길로 이동시켰다. 뒷 차 드라이버도 우리 측도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다. 깜박 졸았다며 죄송하다는 뒷 차 드라이버. 우리끼리 다툴 필요는 없어 바로 보험사에 전화를 했다.


3일간 병원에 드러누워 근육 이완제 등을 맞으며 호사스럽게(?) 교통사고 후유 휴가를 보냈는데, 마지막 날 상대방 보험사에서 합의 제안이 들어왔다. 인당 1백만 원 위로금, 세 식구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도합 3백만 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으잉~~


갑자기 목 디스크 치료비 3백만 원과 교통사고 위로금 3백만 원이 교차하며 지나갔다. 슬며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어, 그런데...정말 이상하다. 희희낙락 잇팁 마눌님 말대로 뭐 어찌 되는구망...참 희한한 일일세. 3백이 필요하다고 땅 꺼지게 걱정했더니 바로 하늘에서 그 돈이 떨어지네...


응용을 해보는 건 어떨까? 엔프제의 상상력으로, 이번엔 1억이 없네... 하고 땅 꺼지는 한숨을 쉬어본다. 옆에서 잇팁 아내는 킬킬대며 말한다. "자기 사망 시 1 억탈 수 있는 생명보험 들어놨는데..."


... 바로 그만두고 그냥 성실하게 살기로 굳게 맘을 먹었다.



엔프제는 미래의 리스크를 확대 해석하고, 잇팁은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엔프제는 늘 불안하고 잇팁은 덤덤한 것이다. 인지심리학에서 '미래 기억'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래의 어느 적절한 시점에 수행할 어떤 일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엔프제는 이 기억을 관장하는 스위치가 지나치게 빨리 켜지거나 오래 켜지는 것 같다. 또한, 이 스위치가 불안과 공포를 관장하는 뇌의 스위치를 연달아 건드리기 때문에 앞서 말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건 나의 경우, 경험으로 느낀 해결책은 "현실에 몰입"하는 것이다. 즉, 미래를 미리 앞당겨 살지 말고 현실을 충실히 사는 것이다.


잇팁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미리 계획하고 리스크 테이킹 할 수 있는 생각의 공간을 뇌에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쩌다 행운이 겹쳐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오늘도 열심히 말씨름도 하고 조율도 해주면서 가정의 현재와 미래를 오락가락한다. 술도 한 잔 같이 마시면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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