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똥을 쌌다. 응가할 때 똥이 아니라 화투의 똥 말이다. 똥 피를 냈는데 그만 피 똥 싸고 만 것이다. 이윽고, 계속 다가오는 불길한 징조, 이번엔 비를 쌌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 벌써 1 고가 들어가 있는 상태인데 내가 먹은 것은 피 2장과 육시럴 육자 하나뿐이었다. 이어지는 2고, 3고, 4고, 5고, 6고... 게다가 나는 광박 피박.
그날 밤, 아내는 무려 195점이 났다. 계산해보니 지불해야 할 돈이 내 한 달 용돈의 범위보다 한참 벗어나버렸다. 뾰로통해진 나는 페이를 거절하고 안방에 틀어박혔다. 계속 들어오는 압박... 한참을 버티다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셔... 예전에 당신도 페이를 거절한 게 있었다구. 지금보다 무려 4배나 더 많은데...힝! 아내는 옛날이야기를 왜 끄내시냐고...빨랑 내놓으시라고... 더욱 심하게 압박해온다.
결국, 처음에 장난 삼아 친 화투가 그날 밤 부부 싸움의 심지가 되어버렸다. 싸움이 시작되자 상대방을 향해 온갖 추접한 비방과 고릿 때 이야기들이 들춰지는가 하면, 평소 칭찬해마지않던 상대방의 성격과 인격은 저주와 악담의 대상이 되었다. 그날 밤 싸움이 끝난 후 늦게 잠을 청하면서 나는 도대체 오늘 저녁 뭔 일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화투? 피 똥? 싸움 중간에 들춰진 나의 치부? 뭐지?
다음날 출근해서 천천히 생각해보니 결국 나의 이기심과 경쟁심이 싸움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부끼리의 사소한 화투 게임에서도 발동하는 이 못된 심성... 후회스러웠다. 카톡을 열어 한참 망설이다 하트 뿅뿅 이모티콘과. 함께 아내에게 "미안! 사랑해!"라고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한참 일하다 띵똥 소리가 나서 카톡을 보니, "나도 미안, 알러븅!" 하는 문자가 도착해있다. 꿍했던 맘이 한꺼번에 풀렸다.
부부 싸움은 물 베기라고 하던가.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 부부싸움도 잘 싸워야 물 베기 효과가 나타난다. 잘못하면 물에도 생채기가 날 수 있다. 다년간의 싸움 경력(?)으로 정리해보면, 부부 싸움이 일어났을 때 아래와 같이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첫째, 논리 따위로 설득하려 하지 말라!
이미 상대가 감정이 상해있다면, 그 상황에서 논리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그냥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뒤집어 자라!
둘째, 억지로 좋은 말을 지어내지 말라!
나쁜 말도 하지 말고 좋은 말도 하지 말라. 나의 감정도 상해있기 때문에 억지로 포장된 말은 언젠가는 내 입에서 다시 한번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역시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뒤집어 자라!
셋째, 섣부른 스킨십을 시도하지 말라!
마음이 아직 아픈데 무슨 스킨십이냐? 옛 조상들은 싸운 뒤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니 슬그머니 스킨십이 들어갔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밤새 할 것이 너무 많다. 괜히 섣부르게 스킨십 시도하다 맘이 안 풀린 아내에게 쳐 맞지 말고, 안방에 들어가 그동안 밀린 넷플릭스 시리즈나 와쳐 시리즈나 밤새 봐라. 아니면 페이스북이나 하던지...
특히 부부 싸움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서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사실(Fact)이어도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은 면전에서 하지 말자. 그것은 그(녀)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고 평생 꺼내기 싫은... 진정 아픈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그(녀)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맘이 아프면 진실도 싫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그녀에게 먼저 카톡 보내라. "사랑해~하트뿅뿅" 이모티콘 잊지말구!!
모든 부부들의 지혜로운 부부싸움을 바라며....
- 2020년 11월의 어느 날, 용모 생각.
(대문 일러스트는 네이버 에동이님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