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 R을 위협하는 오지랖

-조직은 R&R

by 엉뚱이

처음 보는 파워포인트는 신기했다. 직관적인 아이콘을 끌어다 놓으면 도형이 그려지고, 그림자 효과도 멋지게 부가되는, 새로운 신세계 프로그램이었다.


1990년대 초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아래아 한글, 훈민정음, 보석글, 하나스프레드 시트 같은 고전 프로그램을 기억할 것이다. 사업계획 철이 되면 끙끙거리며 날밤 새워 만든 기획서들은 대개 그런 고전 프로그램 덕이었다. 그 이전에는 볼펜으로 써서 기획서를 올렸던 시절이었으니, 사실 지금의 관점으로 고전일 따름이지 당시 부서마다 1대씩 배정되었던 컴퓨터와 고전 프로그램은 우리의 능률을 많이 올려준 효자들이었다.


그런데, 이후 파워포인트와 엑셀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작업의 효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1~2달 정도 걸렸던 각종 사업계획 업무는 단 3일 만에 끝이 날 경우도 있어서, 어쩌면 이 프로그램 때문에 인원이 필요 없는 상황이 되어 모두 잘리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을 야기할 정도였다.


어쨌건 당시 나는 얼리 아답터였던 만큼 회사에 파워포인트, 엑셀이 도입되자마자 밤 늦게까지 홀로 회사에 남아 독학하며 그 기능을 익혔고, 덕분에 몇 달 뒤에는 소프트웨어 관련 사내 클래스를 맡아 강의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자, 회사의 직원들이 파워포인트 기능이 잘 기억나지 않거나, 작동이 잘 안 되면 나에게 와서 조언을 구하는 등 이 프로그램들은 단기간에 나의 몸값이 급등하게 해 주었다. 늘 몸은 피곤했지만, 마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던가... 옛말 그대로 좋은 시간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한창 사업계획 철 때문에 바빴던 10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교육팀 바로 옆 기획팀에서 급히 전갈이 왔다. 갑자기 사업본부장께서 기획서 내용 중 일부에 멋진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기능을 넣었으면 좋겠다는 오더를 내렸다고 했다. 당시 기획팀 인원들은 파워포인트 문서 작성 자체도 서툴렀으니, 애니메이션 기능은 아예 손도 못 대는 상황이었다.


긴급 소방수로 내가 투입되었다. 본부장이 지시한 키워드를 순식간에 멋진 애니메이션으로 현현해놓으니 기존의 밋밋한 문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사무실 근무자 모두가 지켜보며 감탄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획팀이 3일 내내 끙끙거려 만들다 만 것을 단 1시간에 해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기고만장한 나는 아예 덮어놓고 기획서의 내용까지 일부분 고쳤다.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이 추구하는 것은 '간결'+ '핵심'인데, 기존 기획팀이 써놓은 내용 중 일부가 너무 고루해서 간단명료하게 핵심정리를 해주고 애니메이션을 입혔더니 다시 한번 모두들 입이 떡 벌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기획팀장이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아예 앞으로 너는 기획팀으로 와라... 하며 끈적한 말까지 해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때 다른 층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기 부서의 문서도 좀 봐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기꺼이 응했다. 이것 역시 1시간도 안되어 멋진 프레젠테이션 문서가 완성되어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기획실 문서를 실제 프로젝터로 연결해서 슬라이드 쇼 검증을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문제가 발생하였다.


프로젝터로 연결해서 문서를 쏴보니 문서의 일부분이 잘리는 것이었다. 화면 크기를 조절하는 키스톤 기능을 작동해보았지만 문서는 잘린 그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 파워포인트 기능과 프로젝터, 노트북의 기능을 점검해봤지만 상태는 그대로였다.


이윽고 우리 본부장의 프레젠테이션이 다가왔다. 30분 뒤면 사장님 앞에서 PT를 해야 한다. 어쩔 수없이 지금 그대로의 상태로 대강당 노트북에 문서를 업로드하고 그곳의 프로젝트와 매칭 되는 기적을 바랐다.


그러나, 결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업계획이 끝나고, 'OO 사업부는 뒷부분을 안 보여주려나 봐... 일부러 내용을 자른 것을 보니~'라는 사장님으로부터 농담 반 진담 반의 쫑크를 들은 사업본부장 상무는 얼굴이 벌게져 사무실로 올라왔다. 이거 만든 사람 누구야? 하며 큰 소리를 치는 본부장의 말에 기획팀의 모든 인원들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날 오후 조퇴를 신청한 나는 인근 맥주집으로 들어가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벌컥벌컥 혼술을 들이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내 일을 내팽개치고 다른 부서에 가서 열심히 일해주었더니 결국 역적이 되어버렸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놈의 문서는 왜 밑에 잘려 나오는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사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때의 상황은, 해상도의 문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층에서 올라왔던 문서의 일부분이 기존의 노트북 해상도 설정을 건드렸던 모양이었다. 새로운 문서의 해상도 옵션을 풀지 않고 기존 문서를 또 수정했더니 옵션 상태가 그대로 남아 프레젠테이션에 반영된 것이었다.




하여튼 개망신당한 그날의 경험은 나에게 '조직은 R&R'이라는 대원칙을 깊이 마음에 새겨주었다. 조직에서 역할과 책임은, 괜히 분배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만의 조직에서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 역할은 반드시 책임과 연계되어있다. 역할을 뛰어넘는 오지랖은 반드시 그것에 대한 응분의 책임도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자기만의 벽을 만들어서도 안된다. 개인의 R&R은 단위 조직의 R&R과 연결되어있고, 단위 조직은 전사 단위의 R&R과 Cascading 된 맥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큰 그림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누군가 도와달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선까지만 도와주었다. 어차피 책임은 그의 몫이므로, 잘되어도 그의 영예, 안되어도 그의 실패이다. 잘되었을 때 나는 술 한 잔 얻어먹으면 되는 것이고, 안되었을 때는 내가 그를 위하여 위로주를 한 잔 사면될 일이다.


전체 지도 중에 각각 그어져 있는 선과 경계가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알되, 결코 그 선과 경계는 넘지 말자. 다시 말하자면, 전체 숲을 바라보되, 나의 나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 3월 초순, 용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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