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본성과 타인의 불편함 사이의 균형점은 어디일까
나는 MBTI 성향으로 본다면 ENFJ이다. 즉, 외향적인 성격이고 내면의 직관을 중요시하며 감정적인 면이 꽤 기복이 심한 편이고 주변 정리나 체계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성격유형인데, 사실 40대 이전에는 약간 달랐다. 그때는 ENFP 였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ENFP가 더 편하다. P에서 J로 선호도가 이동한 것은 후천적인 영향이 컸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HR 부서에 입사해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기획, 진행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매번 상사에게 불려 가 깨지고 혼이 났다. 학창 시절 덜렁이라는 별명답게 항상 한 두 가지씩 뭔가를 빼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나온 해결책이 '100가지 체크리스트'였다. 어떤 일을 맡더라도 항상 100가지 체크리스트를 만들었고, 그것을 기준으로 업무를 체크해나가니 결국 덜렁거리는 습관이 자동으로 고쳐졌다.
그렇게 몇십 년을 직장생활을 해서 얻은 ENFJ 유형... 하지만 늘 내 마음속 기저에는 ENFP의 욕망이 넘실거리고 있다. MBO와 회사의 목적, 목표에 맞춰진 틀에 박힌 일정, 사람을 만날 때면 머릿속에서 몇 번 정제해 내보내야 하는 메시지들, 기분대로 소리 지르고 싶지만 사방의 눈치를 보고 억눌러야 하는 에티켓, 이름 모를 곳으로 무작정 떠나고 싶지만 주변 환경과 조건에 적당히 맞춘 휴가 일정들...
이 모든 것이 후천적으로 수용된 J 성향 때문에 P가 억압되고 있는 증거들인데, 어떨 때는 목구멍 끝까지 P의 욕망이 흘러나와 정말 간절하게 내 멋대로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나... 내가 속한 공간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렇게 주변에 맞추며 J로 살다 보니 어쩐지 J가 처음부터 내 것인 양 익숙하고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MBTI 검사는 40대 이후에 지속적으로 ENFJ로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무의식 속에 억압된 P는 언젠가 용출될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내면에서 끓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 매우 불안한 느낌도 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고전 역학에서 라그랑주 포인트라는 개념이 있다. 이탈리아 수학자인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가 1772년에 제시한 것인데, 케플러 운동을 하는 천체가 있을 때 그 주위에 중력이 0이 되는 지점을 라그랑주 포인트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행성과 행성이 공전을 할 때 서로에게 끌려들어 가지 않고 정지 상태에 머물 수 있고, 그래서 이 지점에 주로 인공위성을 설치한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런 라그랑주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 타인의 중력과 나의 중력이 맞닿는 궁극의 상호 존중 지점.... 그런 라그랑주 포인트 말이다. 그곳은 남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고도 나의 본성을 잃지 않는 지점일 게다.
그 지점에서는 나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열정, talktive 한 언변으로 주변 사람과 조우할 수 있고 중간에 내 마음대로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꽃잔디와 패랭이 꽃들이 계절의 여신을 치장하는 날이면 바닷가로 예정되었던 발길을 돌려 바로 산골짜기로 들어갈 수 있으며, 추적추적 이슬비 오는 날에는 습기를 머금은 화선지처럼 유리창 표면에 달라붙어 침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타인들에게 호오의 느낌보다는, 흠... 재미있는 친구로군... 하며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지점은 그들과 나 사이의 라그랑주 지점일 것이다. 나의 내면 성향(ENFP)이 분출하는 권계면의 끝이고, 약간 벗어나더라도 나와 타인이 서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지대... 그곳이 바로 나의 Happy Zone은 아닐까.
- 7월의 더운 여름날, 마음대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계획했다가 여러 가지 건으로 틀어져 집에만 있게 되어 뚱해진 용모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