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좋다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내 마음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오늘도 드라마에서는 연인들이 이별한다. 바이얼린의 날카로운 소리가 한쪽의 감정을 표현하고 첼로의 묵시록같은 선율은 사랑의 마지막을 결정짓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감정은 지금 어느 쪽인가.
‘사랑이 변하냐’며 영화 <봄날은 간다>속 유지태의 대사를 읊는다면, 아직 피가 뜨거운 청춘이겠다.
‘다 그런 거지 뭐’하며 히죽 웃는다면 몇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란 동물의 사랑공식을 파악한 선수일 수도 있다. 스스로 이별을 고했고 때로는 당하기도 했던 당신의 사랑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면 아직 영원한 사랑을 믿고 싶은 사랑꾼일 수도 있겠다.
사랑을 꼭 호르몬분비가 과잉상태인 것으로만 여겨야 할까. 노래 한곡이 떠오른다. 6,70년대부터 반세기를 활동하는 포크1세대,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이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오 오오오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고운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장난하고/내마음이 고민에 잠겨있는
돌보지 않는 나의 여인아 나의 사람아
오오오오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새 장난감이 생기면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던 아이가 얼마 못가 싫증내고 돌아보지도 않고 내버리는 모습, 아이를 키울 때 흔히 만나는 풍경이다. 새 장난감을 사달라고 부모 지갑을 괴롭힌다. 사랑하는 마음을 장난감처럼 다루면 어떤 상황이 될까. 그런 사랑은 잔인할 것이다. 내밀 때, 바로 받아주는 사랑보다 애태우게 하는 사랑을 더 간절히 원하는 속성이 따로 있다고도 한다. 밀당... 나쁘다.
노래한 서유석이 직접 곡을 썼고, 가사는 헤르만 헤세의 시를 다듬은 것이다. 1914년 경 헤세가 약 38세쯤에 쓴 이 시의 원 제목은 <아름다운 여인 Die Schöne>이다.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상대가 거들떠보지 않는 상황에서 느끼는 ‘안타까운 짝사랑의 마음’을 노래한 시라고 한다. 헤세는 자신이 여성과의 사랑 관계가 늘 쉽지 않고 어려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헤세가 이 시를 쓴 때가 첫 부인 마리아 베르눌리와 결혼한 지 10년 정도 지난 시기였다니, 헤세가 어떤 여인에 대한 짝사랑을 이 시의 배경으로 삼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영화 <토이스토리> 연작 중 2편에 보면, 사라 맥라클란의 When she loved me 가 흐르는 대목이 있다. 버려진 장난감 인형 제시는 자신과 즐겁게 놀던 주인 에일리를 그리워한다. 어린 시절, 마치 살아있는 친구인 듯 사랑했던 제시를 커가면서 구석에 처박아 버린다. 기다리던 인형 제시를 다시 찾은 날, 에일리는 제시와 함께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인형 따위 필요 없는 때가 되어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으며 흐느꼈다. 그 눈물과 겹쳐졌던 노래가 바로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이기도 하다.
무서운 농담이 생각난다. “잡은 고기에 먹이 주는 거 봤냐?”
낚시나 사랑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미친다. 어떤 일이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얻고 나면 이내 싫증을 내고, 그것을 간절히 원했던 기억조차 잊어버린다. 저쪽으로 밀어 놓는다. 마치 없었던 듯이. 그나마 장난감이면 다행이다. 노래에서처럼, 사람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 부숴버리기까지 한다면, 당하는 쪽의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다. 헤세는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통해 진리를 시 한편으로 세상에 긴 셈이다. 인간심리의 어두운 면을 아이와 장난감으로 표현해 놓아서, 누군가는 노래로 만들고,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은 인생진리를 만나게 된다.
인간은 욕망과 권태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살아간다. 짜장면을 먹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먹게 되면 순간 행복하지만 이내 그 행복한 마음은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곳은 권태가 채운다. 새로운 욕망거리가 나타나면 다시 갖고 싶어 하지만, 역시 과정이 되풀이된다. 아이가 장난감으로 욕망과 권태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어른들은 아파트나 차, 갖고 싶은 물건들로 같은 놀이를 하며 산다. 사랑은 그렇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인 것을 어쩔꺼나. 얻으면 순간 행복하지만 곧 권태기가 찾아온다. 새로운 상대를 찾아 곁눈질을 하며 비극을 향해 걸어가기도 한다.
인간이 왜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가. 사랑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한곡으로 인생진리 하나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앵무새가 온 몸으로 울었’듯이 너무 명확하다. 명확해지니 노래를 들으며 괴롭지는 않다. 이제 <봄날은 간다> 속 유지태에게 말 해줄 수 있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 생겨먹은 것이 그렇다고. 인생이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 같은 거라고. 영화속에서 이영애를 향해 어이없어 하던 그 유지태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노래 제목도 <아름다운 사람>인 것은 갖지 못한 욕망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서글프긴 하다.
그런데 가만있자...이 아름다운 사람의 장난감 다루듯 한 사랑을 꼭 서글퍼 할 일 만은 아니다. <제인 에어>를 쓴 작가 샬럿 브론테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기숙학교를 거쳐 돌아온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여동생과 남동생을 돌보며 5년을 머물렀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 속에 어느 날 아버지가 사다준 장난감 병정들은 결정적으로 작가에게 중요한 인생 아이템이 되었다. 징난감 병정으로 온갖 놀이를 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글로 썼기 때문이다. 이때 장난감놀이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훗날 샬럿에게 <제인 에어>를 낳게 했고, 동생 에밀리에게는 <폭풍의 언덕>을 쓰게 했단다. 친구라고는 동생들뿐이고, 놀이터라고는 광활한 황야가 전부인 시절을 보냈지만, 그런 환경이 오히려 상상력을 발휘하며 놀도록 했고 거기에 장난감이 있었다.
영화 <토이 스토리2>속 인형 제시 역시, 이어지는 영화속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보게 된다. 그 후 또 다른 샬럿 손에서 위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외로움을 달래는 친구가 되어 주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장난감의 다음 생을 생각하지 못했다.
노래 속 야속한 그 사람 역시, 자신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해도 그순간 즐거웠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사랑이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아다시피, 오래오래 함께 했다한들, 그 시간이 내내 행복했으리라 보장은 없다. 어찌 보면, 순간이어서 아쉽지만 순간 자체로도 영원성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기꺼이 장난감이 돼 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여기는 마음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때의 자신이야말로 말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