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홀몸이다. (…중략)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묘사할 줄 모른다. 그것은 마치 ‘구토’같은 것이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여간 어떤 모험이 나에게 생긴다. 그래서 내가 자문할 때 ‘나는 나이며,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 어둠을 쪼개고 있는 것이 ‘나’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행복하다.
사르트르의 <구토> 중 한 대목이다.
이런 생각을 이어주는 노래 한곡이 있다.
여보세요, 누구없소?
가수 한영애가 세상만사 모든 이치를 이미 다 안 것 같은 목소리로 묻는다.
자주 들으며 내가 묻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 노래는 88년도 출생이다.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이고 작곡가인 윤명운씨가 낳았다.
밥 딜런의 노랫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창문을 두드리는 달빛에 대답하듯 /검어진 골목길에 그냥 한번 불러봤소
새벽은 또 이렇게 나를 깨우치려 /유혹의 저녁빛에 물든 내 모습 지워주니
그것에 감사하듯 그냥 한번 불러 봤소
쨍하게 추운 새벽녘, 겨울어둠에 갇혀 잠 못드는 자는 혼자다.
무심코 흐르는 시간과 늘 제자리에 있었던 사물들이 ‘문득’ 눈에 들어오고, 의식속에서 살아난다.
그렇게 찾아온 느낌으로 베란다를 서성이면 어느새 반달이 돼 버린 달빛만이 반긴다. 너도 외롭겠지.
달빛이 선듯하게 다가오는 어둠속을 향해 외친다. “누구없소?”, “그게 누 있나?”
그렇구나. 하루가 세수하고 나서기 시작하는 새벽이다.
그 순간, 사르트르의 ‘구토’같은 새벽이 만져지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줄만 알았더니 저기 새벽이 있구나.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었던’ 나는, 그저 뭔가 이뤄야 한다는 욕망과 그런 자신조차 느껴지지 않은 무개념사이에서 지쳐 가던 중이다.
그 순간 찾아온 새벽이라는 시간과 달이라는, 어쩌면 실존의 깨달음같은 증세를 향해 다시 불러본다.
누구없소? 이전의 누구없소? 와 지금이후의 누구없소? 는 이제 다르다.
질문하는 자의 노래이다.
다시 다가올 구토증세이후의 실존의 모험을 기꺼이 각오하며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누구없소?
지금부터 나는 ‘셀프 구토유발자’가 되기로 한다.
구토 비슷한 문득으로 찾아오는 낯선 존재감, 그 존재감이 자주 찾아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잠깐,
누구없소? 왜 그동안은 이 질문을 나 자신외의 다른 이들과 사물들을 향해서만 해댔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