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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까 Apr 24. 2021

미니멀리스트의 삶이 어려운 당신께 바칩니다

<너를 정리하는 법>, 방자까의 영화 리뷰

곧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개최됩니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년이 흘렀네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또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오늘 이야기할 작품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태국 대표 작품으로 출품되었던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요즘 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일을 그만두고 쉬어가는 차에 '언어 공부나 해볼까' 싶어 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한국에서는 태국어를 들을 일이 전혀 없으니 가능한 많이 태국 작품을 시청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렇게 해서 감상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 영화가 제 인생 영화 TOP3에 안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너를 정리하는 법
Happy Old Year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에 공개된 작품이라 공식적으로 공개된 한국어 포스터는 따로 없더군요. 대신 영어 포스터와 일본어 포스터를 찾아왔습니다. 넷플릭스에서는 영화의 제목을 <너를 정리하는 법>으로 번역해 공개했는데요. 원제 그대로 '해피 올드 이어'로 공개되었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두 영화 포스터 중에 특히 일본어 포스터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Happy New Year’의 'New’를 지워 'Old’로 표시한 아이디어가 영화의 메시지와 정말 잘 맞아떨어지거든요. 주인공 '진'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자 가족과 함께 오랜 시간 살아왔던 집을 정리하기로 결심합니다. 마침 정리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시점도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인 12월이죠. 'Happy New Year'를 위해 물건들을 정리하던 '진'은 물건에 담긴 지난 시간들과 마주합니다. 그녀의 ‘Happy Old Year’들이죠.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미니멀리즘 광풍이 불었습니다. 도서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가 인기를 끌고,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신념을 전 세계에 알린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이 화제였지요. 물론 지금도 그 열풍은 현재 진행형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유행처럼 번졌던 미니멀리즘 열풍에 따라 물건을 싹 정리하려고 했던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지' 하고 물건을 와구와구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물건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해보신 분들은 아마 아실 겁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요. <너를 정리하는 법>에는 이처럼 미니멀리즘을 처음 실천하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현실적인 순간들이 잘 나타납니다.




영화는 잡동사니 정리법, 즉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법을 총 6단계로 제시합니다.


1단계: 목표를 정하고 영감을 얻을 것
2단계: 추억에 잠기지 말 것
3단계: 냉철해질 것
4단계: 흔들리지 말 것
5단계: 더하지 말 것
6단계: 뒤돌아보지 말 것


‘진'은 이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가려고 노력하나,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추억에 잠기고, 냉철해지지 못하고, 흔들리고, 뒤돌아보고... 사실 우리의 인생이 담긴 물건을 냉철하게, 흔들림 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멀고도 험한 길을 헤쳐나가는 주인공은 때로 행복해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버렸던 물건들을 다시 몽땅 가져오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죠. 이렇게 자꾸만 미니멀리즘의 실천법과 미묘하게 틀어지는 주인공의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터집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진’이 웃기기도 하지만, 그것이 미니멀리스트에 도전한 우리들이 겪는 현실적인 순간들이기도 하거든요. 전 ‘진’을 보면서 미니멀리즘에 도전했던 그 어느 날의 제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미니멀리스트의 본보기로 등장한 일본인(아마도 곤도 마리에)은 과거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적이며, 오로지 오늘의 쓸모에만 집중해서 물건을 대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과거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절대 추억의 힘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물건이 가진 가치는 오직 ‘쓸모’뿐이 아니니까요.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추억도 그 안에 담겨있지요. 영화에서도 추억은 뒤로 한 채 물건을 버리기만 하는 '진'에게 친구 '핑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잊은 척한다고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야. 너 혼자 잊는다고 끝나는 건 없어.


미니멀리즘의 법칙을 곧이곧대로 따르며 물건을 그냥 버려 버리는 것은 그저 ‘잊은 척’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게 '웃으며 안녕'을 고해야 합니다. 새해에 미래의 안녕을 기원하며 ‘Happy New Year’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지난 시간에게 ‘Happy Old Year'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지요. 이렇듯 영화는 단순히 정리하는 법이 아니라 '잘 정리하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추억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 추억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너를 정리하는 법>의 나와폰 감독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에 초청되어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죠.


무언가를 추억한다는 게 무조건 좋은 것만 있을 순 없잖아요. 이번 영화를 통해 추억의 위험성도 다루고 싶었어요. (출처: 부산일보)


추억을 되짚어가는 일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진 않습니다. 사실 추억 중에는 쓰라린 것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잊고 싶은 기억인 ‘흑역사’들도 사실은 추억의 한 파편이니까요. '진'도 물건에 깃든 지나간 연인과의 추억을 정리하기 위해 애씁니다. 정리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감정까지 감내해가면서 말이죠. 정리하고, 비우고, 버리는 것도 결국 이별의 한 종류입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추억을 정리하는 것이고, 그 안에 담긴 마음도 함께 비우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물건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이별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려는 사람을 위한 현실적인 지침서 같았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모든 물건과 추억을 버리기보다는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 잊어야 할 것과 잊으면 안 되는 것을 나누어 지난 시간과 잘 안녕하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영화였어요.


실용서에 나올 법한 소재로 이렇게 감성적인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다는 데 감탄했습니다. 사랑과 이별을 다루는 그 어떤 작품과도 달랐기에, 이 영화를 감히 제 인생 영화 순위에 올려봅니다.


Summary

설레지 않는 물건은 모조리 버리기로 한 여자. 하지만 물건에 깃든 추억이 발목을 잡는다. 오랜만에 마주한 전 남자 친구의 흔적. 그녀는 묻는다. 이제 너를 정리할 수 있을까. (출처: 넷플릭스)


Cast

감독: 나와폰 탐롱라타라닛
출연: 추띠몬 쯩짜런쑥잉, 산니 수완메타논, 사리까 삿신수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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