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몰라요>, 방자까의 영화 리뷰
<박화영>은 제게 많은 의미가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극한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죠. 보고 싶지 않은 세상의 단면일지라도 무시하지 말고 오롯이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였습니다. 좋은 의미로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아직도 <박화영>을 처음 보았던 그 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입을 틀어막았던 제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런 <박화영>을 이 세상에 내놓은 이환 감독의 신작이 개봉했다니, 극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박화영>에 등장한 캐릭터 '세진'이 주인공인 스핀오프 영화라니요. 구미가 당길 수밖에요. 그런데 도저히 혼자서는 못 보겠더군요. 두 발로 서서 걸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한 명을 꼬셔서 극장에 데려갔습니다. 충격적일 수 있으니 유념하라는 신신당부를 하고 말이죠. 영화가 끝난 뒤, 친구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걸 보니, 우리가 정말 어른이 되었나 보다고요.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어른들은 몰라요
Young Adults Matters
영화는 아이를 낙태하려는 임신한 10대 청소년 '세진'과 그녀의 낙태를 돕는 가출 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실 저도 제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인가 보다, 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 <어른들은 몰라요>의 이야기 속에는 관습에 따라 행동하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거든요. ‘이런 상황에서는 이래야 한다'는 보편은 이 영화에서 적용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면서 뒤에서는 누구보다 가까운 연인 사이이고, 한참 동안을 '뀨'라는 단어 하나로 대화하는 커플도 나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단숨에 절친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불법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집을 나갔던 언니를 보게 해달라고 울부짖다가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동생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이 10대들을 굳이 겪지 않아도 되었을 불운으로 이끌기도 하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저는 <박화영>으로 이환 감독의 작품을 이미 한 번 맛보았기에, 이러한 낯섦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박화영> 때도 그랬지만, 이환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감히 캐릭터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접어두어야 하거든요. 이미 모두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목처럼 정말 어른들은 모르거든요, 거리에 사는 10대 청소년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나가는지. 줄거리도 다르고, 캐릭터도 다르지만 <박화영>과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감독이 말하려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 이런 삶,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그저 직시하라는 겁니다.
세상엔 특정한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있고, 그저 재현함으로써 메시지를 대신하는 영화가 있는데요. 이 작품은 명백히 후자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배우들조차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니, 잠시 이야기를 보고 들으러 온 우리가 그 아이들을 잠깐 사이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한 번 이 세상에 숨어있는 10대의 모습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감독의 도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혹시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 ‘세진’과 그의 친구 ‘은정’의 관계성이 궁금하셨던 분 없으셨나요? 어떤 영화 리뷰를 읽어 봐도 주인공 ‘세진’과 그의 친구 ‘은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글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관계성이 의미하는 바가 정말 궁금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
‘은정’은 친구들 앞에서는 ‘세진’에게 학교폭력을 가하지만, 친구들이 없는 곳에서는 비밀스레 ‘세진’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이중적인 인물입니다. ‘세진’이 가출을 감행한 것도 ‘은정’이 갑작스럽게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후였죠.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세진’의 가출과 ‘은정’의 죽음에는 분명한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습니다.
‘세진’은 ‘은정’으로부터 우정과 사랑은 물론, 권력과 폭력까지 배웁니다. 그런 ‘은정’이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 ‘세진’은 그 자리에 ‘주영’을 채워 넣습니다.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가볍기 이를 데 없는 이 18세 소녀에게 ‘은정’이 과연 얼마나 큰 의미였는가를 고찰해보자면, 실은 확답이 어렵습니다. 그녀는 ‘은정’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담임 선생님과 연인 사이였으며, 그와 잠자리를 가지는 와중에 콘돔을 날려버리고,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출 팸을 만드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아이니까요. 심지어 ‘은정’의 죽음을 두고도 그리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에게 ‘은정’이라는 친구 역시 그저 흘러가는 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극 중에서 ‘은정’이 사라지고 난 뒤, 딱 한 번 다시 ‘은정’이 등장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매물로 나온 무속인이 살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가출팸과 몰래 잠입했던 날이죠. 그녀는 스마트폰에 ‘은정’의 사진을 띄워두고 무속인의 제단에 올려둡니다. 그리곤 약에 취해 밤새 헤롱거리다가 환각 속에서 ‘은정’과 함께 갔던 락볼링장과 비슷한 곳에 있는 자신을 봅니다.
영화에서는 제가 설명한 것보다도 더 불친절하게 둘의 관계를 서술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진’에게 ‘은정’은 중요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가볍게 대하고, 가족마저도 짐처럼 여기는 이 아이가 유일하게 다시 떠올린 사람이거든요. 둘의 관계를 불친절하게 묘사한 것은 어른들은 감히 이해하려 시도조차 않는, 그러니까 ‘어른들은 모르는’ 그들의 소중한 관계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아니었을까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어른들은 몰라요>는 이환 감독의 전작 <박화영>은 어느 정도 연결고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일단 <박화영>에 등장하는 ‘세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이유미 배우)가 다시 한번 ‘세진’ 역을 맡았다는 점도 있고요, 비행청소년 10대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맥을 같이 합니다. 심지어 방금 이야기한 ‘은정’도 <박화영>에서부터 이어지는 캐릭터지요. 저 역시도 <박화영>과 <어른들은 몰라요>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유사하다고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영화는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실은 무척이나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양새라 함은 비주얼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이환 감독은 영화적 연출을 꽤 시도합니다. 롱보드를 타는 ‘세진’의 장면도 그렇고, 약에 취한 가출 팸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묘사한 장면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사이사이 삽입된 힙합씬의 BGM들까지도 말이죠. 어떤 장면에서는 BGM이 너무 커서 대사가 잘 들리지 않기도 했습니다.
영화 자체를 ‘하이퍼 리얼리즘’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던 <박화영>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인데요. <박화영>이 현실성을 극대화해 메시지를 전했다면, <어른들은 몰라요>는 극적 연출을 가미해 오히려 메시지를 뭉그러뜨린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10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네가 과연 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감히 그들을 이해할 생각은 접어둬.”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둔달까요. <박화영>을 보신 분들은 <어른들은 몰라요>를 감상하시면서 같은 메시지를 다루면서도 전작과 확연히 다른 결의 문제작을 다시 한 번 세상에 토해낸 이환 감독의 역량에 감탄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보힘, 믿보환’. 저는 이환 감독의 작품을 이렇게 정의하렵니다.
정말 보기 힘들지만, 믿고 보는 이환 감독 작품
아마도 저는 다음 작품 역시 혼자서는 절대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굴 끌고 가서라도 반드시 볼 겁니다. ‘믿보환’이니까요.
18세 ‘세진’, 덜컥 임산부가 되어버렸다.
무책임한 어른들에 지쳐 거리를 떠돌던 ‘세진’은 가출 경력 4년 차, 동갑내기 ‘주영’을 만난다. 처음 만났지만 절친이 된 ‘세진’과 ‘주영’, 위기의 순간 나타난 파랑머리 ‘재필’과 ‘신지’까지 왠지 닮은 듯한 네 명이 모여 ‘세진’의 유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
어른들은 모르는 가장 솔직한 10대들의 이야기
감독: 이환
출연: 이유미, 안희연, 신햇빛, 이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