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까의 세상' 프롤로그
“대중이 아닌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대중을 위해 자아가 없는 글을 쓰는 것보다 낫다.”
시릴 코놀리(Cyril Connolly)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는 유명인의 말로 매 에피소드의 포문을 연다. 얼마 전 시청한 에피소드에 등장한 명언은 영국 작가 시릴 코놀리의 것이었다. 그의 말은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2020년 11월, 프리랜서 에디터로서 일을 시작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글쓰기로 돈을 벌자. 글쓰기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잘하는 일이었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 사라졌으니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듯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8시간 이상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엉덩이가 더 무거웠다. 종일 책상머리를 지켰던 고3 수험생활이 겹칠 정도였다. 기껏해야 하루에 200원 언저리의 광고 수익을 위해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렸고, 몇 없는 작업물을 그러모아 취업 정보 사이트에 포트폴리오를 등록했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 직장 동료, 친구, 지인들에게 구애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돈보다 이상을 좇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돈벌이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것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이상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난 일 년간 내 열 손가락이 피아니스트만큼 빠르게 움직였던 건 오로지 돈, 돈, 돈 때문이었다.
몇 달이 흐르고 조금씩 일감이 늘어났다. 차츰 돈도 모였다. 다행히 의식주를 영위하는 데 불편함이 없고, 때때로 원하는 걸 망설임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벌었다. 돈 이외의 성과도 얻었다. 어떤 글은 포털 사이트 대문에 걸렸고, 어떤 글은 하루아침에 조회수 수만 회를 넘겼으며, 어떤 글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작업물을 보고 회사 관계자가 직접 일을 의뢰한 적도 있었다. 직장에 다닐 때만큼 벌진 못했지만, 혼자서 이만큼 해낸 것만으로 자랑스러웠다. 처음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 느꼈던 금전적 부담은 점점 그 몸집을 줄여갔다. 그러나 뿌듯함은 잠시였다. 부담감이 사라진 자리엔 그보다 더 큰 몸집의 고민거리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걸까?’
이러한 고민은 모순적으로 가장 일감이 많을 때 싹을 틔웠다.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을 지급하는 주체가 원하는 글을 써야 한다. 고용주는 검색 엔진에 잘 노출되는 글, 대중의 시선을 끄는 후킹(Hooking)한 글, 이미 양산된 기존 콘텐츠와 부합하는 글을 원한다. ‘글을 쓴다’라는 표현보다는 ‘콘텐츠를 뽑아낸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글도 결국 하나의 상품이다. 고용주와 대중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상품을 기계처럼 뽑아내야 했다. 시릴 코놀리의 말처럼 대중을 위해 자아가 없는 글만 써냈다. 상업적 글쓰기에 전념할수록 나날이 회의감이 커졌다. 한 편의 글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좋아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은 없었다.
나를 위한 글쓰기가 필요했다. 상업적 글쓰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돈이 안 됐기 때문이다. 돈벌이로 이어지지 않는 글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기 싫었다. 돈이 안 되는 글을 쓰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개인적 글쓰기를 실천해야 할 당위를 뼈저리게 실감했으나, 부끄럽게도 그뿐이었다.
상업적 글쓰기에 대한 회의감이 재능에 관한 고민으로 바뀐 건 이때부터였다. 계속해서 글을 썼지만, 나는 도리어 글 쓰는 법을 잊어갔다. 어느샌가 내 글엔 반복적인 구절이 많아졌다. 어휘는 단출했고, 표현은 늘 거기서 거기를 맴돌았다. 머릿속 생각을 글로 옮기지 못하는 바보 같은 순간들도 겪었다. 끊임없이 글을 쓰는데도 실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전에도 내가 재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마는, 발전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실은 예견된 일이었다. 글쓰기로 먹고살겠다고 선언해놓고 오히려 책과 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글자 놀음에 파묻혀 심지어 글자 그 자체가 꼴 보기 싫어진 적도 있었다. 무릇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만 성장할 수 있는데, 나는 성장을 거부했다. 재능은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러나 이제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글을 완성했을 때의 만족감과 행복을 되찾고 싶다. 글쓰기를 수단으로 치부한 나날을 반성하고, 알량한 마음을 버릴 시간이다. 글쓰기 그 자체가 목적인 글쓰기를 해야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겠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멋진 어른의 모습을 되찾고자 ‘자까의 세상’을 시작한다. 비록 현실과 타협하게 되더라도 이상을 버려서는 안 된다. ‘대중을 위한 글’이 현실이라면, ‘나를 위한 글’은 이상이다. 글쓰기 그 자체로 목적인 글이 바로 나의 이상이다.
‘자까의 세상’의 주제는 나와 이 세상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무형의 영역에 있는 기억, 생각, 감각, 감정들을 글에 담아두려고 한다. 행복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형태가 없어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글과 만나면 유형의 것이 된다.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글 쓰는 사람으로서 단단해지고 싶다. 또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쓴다’는 소개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추리소설 작가 레이먼드 손턴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가 제시한 ‘미스터리 소설을 위한 열 가지 원칙'에는 미스터리 장르의 요소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좋은 이야기여야 한다는 계명이 있다. 언젠간 나의 모든 글이 그 자체로 좋은 이야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대중을 위한 글’과 ‘나를 위한 글’을 모두 거뜬히 써내는 전업 작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몇몇 작업을 함께한 동료들은 감사하게도 나를 ‘작가’라고 불러준다. 사실 내게 그 호칭은 과분하다. ‘작가’가 아닌 ‘자까’로 이름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작가’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 이 자리를 빌려 약속한다. 아직은 존재가 희미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한 나의 독자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