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하이네이티브'에서 배우는 낯섦의 철학
하이네이티브(HiNative)는 전 세계 원어민이 언어와 문화에 관해 서로 묻고 답하는 외국어 학습 커뮤니티다. 일상 표현, 어감 차이, 입말 등 책이 알려주지 않는 언어의 면면을 배울 수 있어 언어 학습자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비인기 언어인 태국어를 공부하는 나도 유용하게 쓰고 있다. 사전에 검색해도 의미가 나오지 않거나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어감이 와닿지 않을 때 특히 도움이 된다.
요즘 나는 하이네이티브에 완전히 중독된 삶을 살고 있다. 문제는 외국어 공부는 접어두고, 도리어 답변하는 재미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태국어 원어민에게 질문하기보다 한국어 원어민으로서 답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려고 접속했다가 답변에 열중하느라 공부가 뒷전이 된 적도 많다. 이전까지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불편하게 접속했는데, 얼마 전부턴 아예 앱을 설치해 아주 본격적으로 답변을 달고 있다.
여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엉뚱하고 신선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걸 어쩌란 말이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이끌리는 시선을 막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겨울’과 ‘동계’, ‘얼굴’과 ‘낯짝’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우박이 치다’와 “우박이 내리다’는 어떻게 다른가요?”
이런 질문을 맞닥뜨리면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에디터로서, 어떻게든 궁금증을 해소해주겠다는 모종의 의지가 불타오른다. 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싶은 언어 학습자의 열망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말에도 맛이라는 게 있다. ‘태양’과 ‘해’는 같은 뜻이지만, 묘하게 어감이 다르다. 가수 비의 노래가 ‘해를 피하는 방법’이 아닌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된 것도 어감 때문이었으리라. 언어 학습자는 바로 이 말맛을 알아내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하고 궁리하고 추측해봐도 원어민이 직접 설명해주지 않는 한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마다 이러한 의구심에 사로잡히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절로 솟아났다.
언어 학습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라 그런지, 하이네이티브에는 열정이 묻어나는 답변들이 많다. 답변을 살펴보면 어감의 차이를 완벽하게 설명하려고 고민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나도 가능하면 도움이 되는 답변을 남기려고 힘쓴다. 어쭙잖은 영어 실력으로 답변을 쓰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단지 영어 실력 때문에 답변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다. 어감의 차이는 설명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동계’와 ‘겨울’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답하고자 사전과 인터넷을 뒤져가며 한참이나 그 의미와 용례를 파악했다.
사전에 의하면 ‘동계(冬季)’는 ‘동기(冬期)’와 같은 뜻이다. ‘동기’는 한자어로, 겨울의 시기를 뜻한다. 그런데 ‘동기’는 우리말로 바꾸면 ‘겨울’이 된다. 결국 ‘동계’와 ‘겨울’은 같은 뜻인 셈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자. ‘동계’는 주로 글말로 쓰고, ‘동계 올림픽’, ‘동계 의류’처럼 다른 단어와 결합해 사용할 때가 많다. 반면 ‘겨울’은 상대적으로 입말로 자주 쓰고, ‘겨울을 나다’처럼 단독으로 사용하는 일도 잦다. 같다고 말하기엔 아리송한 면이 있다. 한국어에는 이처럼 미묘한 단어들이 정말 많다. 모든 언어가 그렇겠지만, 한국어는 우리말,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가 다채롭게 섞여 있어 더 애매하다. 앞서 이야기한 ‘태양’과 ‘해’도 그렇고, ‘장소’와 ‘위치’, ‘하얗다’와 ‘희다’, ‘열정’과 ‘열의’ 등이 그렇다.
어감의 차이에 매달리게 되는 외국인과 달리, 원어민은 오히려 그 차이에 큰 관심이 없다.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뜻을 체득하며 써왔기 때문이다. 어감의 차이를 정확하게 밝혀주기를 요구하는 외국인 학습자에 의해, 일상의 영역에 머무르던 단어들은 비일상의 영역으로 이관된다. ‘얼굴’과 ‘낯짝’의 차이를 밝혀내는 과정도 그랬다. 나는 어떤 때 ‘얼굴’을 쓰고, 어떤 때 ‘낯짝’을 쓰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의 질문은 받은 후에야 당연하게 써온 단어들의 속뜻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얼굴’은 사람 머리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말하지만, ‘낯짝’은 얼굴을 속되게 일컫는 말이다. 사람 머리를 낮춰 부르는 말인 ‘낯(面)’에 앞의 명사를 얕잡아 이르는 접미사 ‘-짝’이 붙어 만들어졌다. “낯짝이 안 좋다”라는 말은 써도 “낯짝이 좋다"라는 말은 쓰지 않는 이유다. 만약 누군가 후자의 표현을 썼다면 그건 명백히 비방의 의미일 것이다. 몇 발짝 떨어져 단어들을 직시하고서야 어물쩍 넘겨짚었던 어감의 차이를 정확히 알았다. 비일상의 영역은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표현들과 거리를 두는 곳이다. 나아가 마땅한 사실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곳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어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곳이다. 외국인의 낯선 시각 덕분에 단어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됐다.
일상생활에서도 때때로 익숙한 단어가 비일상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들을 겪는다. 얼마 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영화 속 형사들은 경찰서에 불려 온 외국인 용의자가 잘 알아듣도록 ‘부검’, ‘두부외상’ 같은 단어를 쉽게 말하려고 애쓴다. 이상하게도 단어를 공들여 설명하면 할수록, 관객은 하릴없이 그 단어들이 어색해지고 만다. 한국어 학습자에게 구구절절 ‘동계'와 ‘낯짝'을 설명하려다가 단어의 낯섦에 가닿았던 나처럼 말이다. ‘그런 순간’ 하면, ‘까닭'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집착했던 열댓 살 때를 또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의 나는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까닭'이 등장할 때마다 까닭 없이 그 단어를 반복해서 읊조리곤 했다. 그러다가 지금 웅얼거리고 있는 말이 정녕 ‘어떤 일의 이유나 원인’을 뜻하는 단어가 맞는지 의심했고, 이 단어는 어쩌다가 이런 글자의 모양이 되었는지 골몰했다. 결국은 그 단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바람에 구태여 ‘이유’ 같은 말로 바꿔 썼다.
이렇듯 단어의 낯섦을 경험하는 생활 속 순간들이 있지만, 낯섦은 대체로 예술에 의해 선사된다. 창작자는 너무 당연한 나머지 대중이 놓쳐버린 삶의 조각을 발견하고, 대중은 낯섦을 통해 새로운 통찰과 색다른 흥미를 느낀다. 단어의 낯섦을 경험하는 순간을 묘사한 <헤어질 결심>은 실은 낯섦을 선사하는 예술 작품이다. 낯섦을 선사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굳이 꼽자면, 배우 탕웨이가 연기한 외국인 용의자 ‘서래’가 남편의 시신을 보고 내뱉는 한국어 대사를 고르겠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마침내’는 ‘드디어’, ‘끝내’, ‘이윽고’, 결국’ 등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강한 단어다. 한국인들이 입말로 자주 쓰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다. 영화는 ‘마침내'라는 단어를 사용해 단어 그 자체는 물론, 그 말을 뱉은 ‘서래'를 낯설게 한다. 낯섦은 영화에 서스펜스를 부여하고, 인물을 부각한다. 아마도 관객들은 <헤어질 결심>이 선사한 낯섦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랜 시간 ‘마침내'라는 단어를 음미했을 것이다.
감독과 작가가 먼저 ‘마침내’라는 단어를 낯설어하지 않았다면, 관객을 낯설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작자가 대중을 낯설게 하려면, 먼저 낯설어해야만 한다. 창작자는 낯섦과 친해져야 한다. 단어를 낯설어하고, 세상을 낯설어함으로써 종국에 대중을 낯설게 할 수 있다.
익숙함을 낯섦으로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당연히 여기지 않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노력이 당연하다. 컴퓨터로 쓰던 글을 연필로 써보고, 집에서 읽던 책을 여행지에서 읽어보고, 우산을 쓰는 대신 비를 맞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 하이네이티브에 꾸준히 답변을 달며 낯선 시각을 던져주는 한국어 학습자들의 덕을 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방금도 하이네이티브에 ‘게으름 피우지 마’와 ‘게으름 부리지 마’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 올라왔다. 다시 한번 비일상의 영역에서 단어들과 씨름할 시간이다.
‘낯섦’은 친숙하지 않아 어색하고 서먹한 것인데, 궁극적으로 이것과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 묘하다. 이것도 또 하나의 낯섦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