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간 우정 불가론에 대해
어릴 때는 전국으로 순환근무를 다니시는 아빠 때문에 전학을 많이 다녔고, 대학은 여대를 나온 내가 남사친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가끔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남사친을 사귀었다.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대외활동에서, 연합동아리에서, 그리고 친구의 친구와 함께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연락이 이어지고 친구가 되었다.
공부를 할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취업준비를 할 때도 남사친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는데, 단지 성별이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지 못했던 발상의 전환과 아이디어를 얻게 될 때가 많았다.
나의 애정 하는 남자사람친구들
일단 남녀 사이뿐 아니라 동성 간에도 인간적 호감은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이 내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껴질 때 좋은 인상을 받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대학 1학년 때 미팅 주선자로 나갔다가, 내 친구에게 관심을 가진 남자가 나에게 도움을 청했고 나 또한 그 친구가 괜찮은 사람 같아 보여 적극적으로 둘 사이를 이어주려고 노력했다. 지금 그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고 여전히 알콩달콩 살고 있다. 그래서 나 또한 결혼을 준비할 때 이 커플에게 고민상담을 자주 했다. 둘 다 친구로서 나를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각자 남자 쪽 입장, 여자 쪽 입장으로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다른 미팅에서는 나를 데려다준다며 누군가 따라 나왔다. 마침 집도 같은 동네여서 함께 택시를 탔다. 그때 나는 눈치도 없이 지금 썸 타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말해버렸다(파리에서 나를 메신저로 차 버린 바로 그 남자). 상냥하고 매너 좋은 그 친구가 처음부터 참 편했나 보다. 얼마 뒤에 그 친구는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같이 택시를 탔지 이 맹추야” 라고 말하며 면박을 주었었다. 어린 나이에 가벼운 호감으로 시작된 인연은 마음 통하는 친구라는 소중한 선물로 남았다. 파리에서 실연을 당하고 이 친구에게 전화해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본인도 기꺼이 국제전화요금을 내 가며 조곤조곤 힘 되는 말들을 해주었다.
언제인가 친구가 토익 스터디 팀원들과 밥을 먹고 있다면서 근처면 들르라고 연락이 와서 갔다가 그 팀원들과 모두 친해져 버린 일도 있었다. 그중 한 명과는 지금도 남편과 함께 종종 술 한잔을 하는 사이다. 신혼초에 카드값 계산을 잘못해서 가계부가 마이너스될 뻔한 적이 있는데 그때 유일하게 돈 좀 빌려달라는 말을 꺼낼 수 있었던 듬직한 친구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지금 당장 연락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남사친들이 대여섯 명은 된다.
남자는 여자를 ‘친구’로 만들지 않는다?
나는 ‘남자’를 친구로 만든다!
동갑내기부터 연하, 오빠까지 남사친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나 시작은 호감이었을지라도 지금은 동성친구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는 10년을 알고 지낸 남사친에게 “넌 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줘”라는 고백 같은 말까지 들었다.
나 역시 너무 여자여자한 친구들보다는 차라리 남자 친구들이 편하다. 그래서 지금 내 가까운 친구들을 보면 여자는 대체로 무던하고 시크한 성격이고, 남자는 센스 있고 다정한 성격이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 패널들의 피드백에서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말이 “남자는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없다. 곁에 있다면 100% 이성적 호감이 있는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 감정의 발단이 어떻든 간 지금은 '친구이기로 한' 사이다. 정말 그런 의심이 드는 녀석이 한 명도 없긴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여전히 혹은 새로이 '딴 맘'을 품었다고 해도 나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다. 그들 역시 나와 친구로 지내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도 아니고 치명적인 미인도 아닌 데다 결혼까지 한 평범한 여자와 계속 인연을 유지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내 남사친들이 좋다. 그 친구들이 남자여서가 아니라, 그 남자들이 내 친구여서 좋다. 폭넓은 직군의 다양한 트렌드를 공유하거나, 서로의 경험담을 나누면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이 여성을 대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미래와 사회를 어떻게 맞춰나가는지를 지켜보고 있으면 문득문득 내 남편의 마음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순수한 남자사람친구가 있다는 것은 네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받아줄 수도 없는 마음보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더 관심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리고 이성적 동기(?) 없이도 내 옆에 기꺼이 머무르기로 한 친구들에게 오히려 고맙다. 나와 대화하고, 맛있는 걸 함께 먹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즐겁다는 뜻으로 느껴져서.
내 남사친들 모두 내 남편을 좋아한다. ‘남자가 보는 남자’로서도 합격, ‘아군이 보는 파트너’로서도 합격인 셈이다. 남편 역시 그들을 알고 그중 몇 명과는 친근하게 지낸다. 그들은 출장길에 사 온 비싼 양주를 들고 우리 집에 오기도 하고, 자기 여자친구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반면에 나는 주로 남편과 싸웠을 때 같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분풀이를 하거나 남자의 심리를 캐묻는 경우가 많았네. 이 참에 반성! (너네 혹시 내가 아닌 우리 남편 때문에 나랑 노는 거니?)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수가 많든 적든 이성이든 동성이든 자랑할 일이 맞는 것 같다. 나의 결혼 후에도 변하지 않았던 그 고마운 우정이 그들의 결혼 후에도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p.s 지난달 결혼한 J, 그리고 5월에 결혼하는 S 모두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