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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Mar 18. 2019

나를 움직이는 사소함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사소한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의 효과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더 절절하게 느낀다. 똑같은 일과가 반복되는 와중에도 그 어느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하고 있고 내일도 또 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클을 유지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고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마법의 가루를 탄 것만 같은 집밥

결혼 전, 나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미료가 가득한 식당 밥을 먹고도 끄떡없이 오후 근무를 해내고 왔는데, 이상하게 엄마 밥만 먹으면 따뜻한 모래 위에 웅크린 닭처럼 하릴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결혼하고 나니 남편이 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 그렇게 꾸벅꾸벅 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정리해야 편하게 쉴 수 있는 나는 맥을 못 추는 남편 대신 싱크대로 그릇을 나르고 남편은 “고마워.. 미안한데 나 지금 못 움직이겠어 설거지는 이따가 내가 할게!”라고 말하며 끙끙댄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는 정성스러운 밥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꽉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어서가 아닐까.


밥을 받아먹는 사람이 충만한 사랑을 느끼는 만큼, 밥을 하는 사람도 그만큼의 사랑이 있어야 동력이 생긴다. 간혹 남편과 싸우거나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 즐겁던 요리가 눈곱만큼도 하기가 싫은 걸 보면, ‘식구’라는 게 생존에 얼마나 유리한 전략인지 실감한다. 엄마가 식구들이 없을 때 된장찌개 남은 거에 밥을 말아먹거나 빵으로 때우던 모습을 내가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 사랑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전날, 오늘 아침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차곡차곡 쌓여야 한다. 내 수고를 알아주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표현할 때 나는 저녁밥뿐 아니라 여타 집안일을 더 능동적으로 해낸다. 그렇게 두고 보면, 밥은 내가 하지만 밥을 하게 만드는 건 남편이니 한 끼의 식사는 우리 둘의 합작품인 셈이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발소리

근사하게 인테리어를 하고 소품 하나까지 컨셉추얼하게 맞춘 ‘집스타그램’을 볼 때면 나도 당장 이사를 가고 싶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나도 인테리어를 했을 거다. 그러다가도 뉴스에서 사건 보도를 하며 자료화면으로 어둡고 후미진 골목길이 나오면 그래도 전철역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길이 훤한 대로변이고 경비 아저씨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하기도 한다. 우리 집은 20년 넘은 낡은 아파트지만 튼튼하고, 세대수가 적지만 그만큼 체계적인 관리가 잘 되는 편이라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멀쩡한 집을 합법적으로 차지하고 살고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여행을 다녀오면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익숙한 자리에 놓여있는 이 공간이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것을 매번 깨닫는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면서 내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새로운 순간이 생겼다. 3층인 우리 집까지 계단으로 올라오는 남편의 발소리다. 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오면 가끔은 요리를 하면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왔어?”라고 인사하기도 하고 가끔은 현관까지 나가 배꼽인사를 하며 “다녀오셨어요~.”라고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포옹을 하고 서로의 어깨와 등을 토닥인다. 우리가 서로 웬만하면 평일 저녁 약속을 만들지 않는 이유다.


서로의 재회가 그리도 반가울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하루동안 최선을 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하루 회사에서 열심히 일 한 남편도, 그런 남편을 위해 집안을 정리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나도(물론 낮에는 카페에 가서 망중한을 즐기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는 등 본능에 최선을 다한다) 함께할 수 있는 이 반나절을 위해 나머지 반나절을 보낸다.


커피 한 잔이 재촉하는 출근길

회사를 다닐 때, 내가 월요일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사 마시는 회사 근처 카페의 라떼 한 잔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주말 내내 캡슐커피만 마시다가 이틀 만에 사 마시는 ‘바깥 커피’는 유독 맛있었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자리를 정리한 뒤 친한 동료에게 카톡을 보낸다. ‘과장님, 커피 콜?’ ‘네네. 당연하죠!’ 그렇게 함께 커피를 사러 다녀오며 나누는 짧은 대화의 내용은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교환한다는 고급(?) 정보에 견줄만했다. 요즘 누가 이슈의 중심에 있는지, 누가 퇴사를 준비 중인지,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 등 시시콜콜하지만 화제는 매일 업데이트되었다.


사무실에 돌아와 키보드 옆에 라떼를 놓아두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다. 한 모금씩 홀짝거릴 때마다 향긋한 커피 뽕을 맞아 더 가열차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예전에 여의도에 있는 한 은행에서 인턴생활을 하면서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다니는 직장인들이 어쩐지 멋져 보여 나도 매일 커피를 사들고 출근하던 것이 그대로 습관이 되었다. 실상은 코앞에 닥친 업무를 쳐내느라 허덕이며 거의 링거 수준으로 카페인을 투여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상상 속에서만큼은 늘 그 시절 여의도의 커리어우먼이었다. 내가 직장에서 내 몫을 온전히 해내고 있다는 확신, 열심히 일하는 내 모습에 대한 자기만족이 그 라떼의 맛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매일 사 마시는 커피 값만 절약해도 은근 쌈짓돈을 모을 수 있다며 ‘라떼 적금’이 유행하던 때에도 더 싼 카페를 찾아 커피값을 줄이면 줄였지 절대 끊을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그 평범한 라떼 한 잔의 효능이 분명했기에 너무나도 합당한 소비였던 것이다.


지금은 엄마의 집밥을 매일 먹는 것도, 회사 앞 라떼를 매일 사 마시는 것도 더 이상 내 일상이 아니다. 결혼하고 나니 엄마가 아침 저녁으로 얼마나 바지런을 떨었을지가 그려지고, 마치 적금을 찾듯 뒤늦게 감사한 마음이 한 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엄마의 계좌에서 로그아웃한 신세니까 이제는 그 마음을 도로 남편에게 적립하고 있다.  한편, 라떼 한 잔의 아쉬움은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 집에서 가까운 카페로 옮겨갔다.


무언가 확실하게 행복했던 기억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 같다. 가끔 그 당시의 일상이었던 행복들에 대해 미안해질 때가 있다. 그때 더 만끽할 걸. 충분히 누릴 걸. 특히나 엄마와의 시간이 그렇다. 난 그렇게 시간만 되면 나가 놀기 바빴고 꽃단장하느라 아침을 거르기 일쑤였다. 엄마, 미안. 시집간 딸로서의 일상에 좀 더 충실해볼게.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사소한 행복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압력밥솥에 압이 들어가는 소리, 남편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아침에 만들어 마시는 모카포트 커피.


그렇게 오늘도 별일 없이 하루가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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