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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Aug 26. 2022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19일 차, 20200405

생명으로 생명에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사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생명을 위해 생명을 찾는지.

고립되어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만나는 존재는 사실 단 하나, 화면의 얼굴과 스피커 소리다. 화면 안의 모습들은 연결된 계정을 따라 그때그때 변화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보는 것은 동일한 화면일 뿐. 생명의 모습을 담고 있는 죽은 존재를 마주하며 지낸다. 가짜 생명 가짜 빛. 


사실 이렇게 계속 지내는 것도 익숙해지니 어색하지 않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14회 일기) 이 생활도 어느덧 일상인 것이다. 

일상에는 관성이 있어서 불만을 갖고 지내다가도 무뎌지기 쉽고 그 관성에서 뛰쳐나오기는 더욱이나 어렵다. 

인생의 굴레라는 서미싯 몸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감히 그의 글을 조금 정정한다면 인생의 굴레가 아니라 일상의 굴레가 우리를 옥죄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가 수여한 디지털 만남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어제는 과감한 불법행위를 했다. 나만 대담하게 친구를 만나는 줄 알았건만, 

밖을 나가보니 좋은 날씨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이더라. 다들 너무 밝은 햇살 안에 불법행위를 저지르며 코로나 따위 뻘쭘하게 만드는 봄날의 축제를 즐기고 있더라.

너무 쉽게 보이는 행복한 사람들의 존재가 눈에 밝힌다. 그 안에 함께 하고 있는 나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닐까, 오랫동안 그늘진 방 안에서만 지내다가, 그래 오늘 하루만 날이 풀린 김에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하는 거야!라는 그런 사람들이 수 백, 수천은 되어 보인다. 

결국 다들 생명이 그리웠던 것인가.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더욱이나 많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디지털 만남의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탓인지, 참을성이 적은 탓인지 유독 더욱 밖에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어른들의 참을성 뒤에 숨겨진 그들의 무뎌진 생명 감각 때문은 아닐지.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나의 최근 일상은, 책을 보고, 드래곤볼을 보고 화상통화를 하는 것으로 대부분이 채워졌었다.

가끔 유리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손톱을 자르는 빈도만큼도 되지 않는 대화 횟수에, 더욱이나 감기 기운 있는 유리는 가까이하기 꺼려진다. 

디지털 일상이 마약처럼 나를 잠재워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지내던 찰나 진짜 생명과 맞닿았다. 

사랑이 감싸고 있는 가정. 그리고 그 안의 한 아이. 쉴 틈 없이 움직이는 한 가정의 하루가 화면 뒤에서만 이루어지는 나의 하루와 대비되어,

내 일상의 생명 없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리 디지털 피플과 교류해도, 결국은 화면일 뿐, 그 온기와 촉감은 어찌하지 못하잖아.


삼촌~! 이런 생명력 넘치는 말을 들었던 적이 언제이고. 

삼촌~! 누가 나와의 시간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간구하였던가.

생명이 담긴 말로 생기를 전달받았다. 

역시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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