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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23. 2024

자연의 섭리를 닮은 인간의 삶이라면,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27일 차, 20200413

이사를 위해 짐을 싸다 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항상 찾아온다.

지난번에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이사 올 때도 그랬고, 방만 단순하게 바꾸는 그때에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렇다.

독일에 처음으로 이사오던 때가 생각난다. 호기롭게 여행용 케리어 두어 개로 시작한 독일 생활. 그때의 불확실성이 지금의 이사보다 더 크지만 왜 나는 갈수록 불안해하는지. 심난한 이유를 알 수 없어 아직 일이 덜 마무리된 까닭일까 싶어 잡상을 거두고 마저 하던 일을 계속한다.

혼자 짐을 싸는 일은 몸보다 마음을 더 지치게 한다.


이사로 짐 싸는 일 따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며 피곤해하는 내 모습에 다시 한번 실망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 그 끝에 잎새가 가득하다.

항상 셔터를 내려놓아 보이지 않았던 창문 끝 나뭇잎에 어느샌가 초록 기운이 터져 나왔다. 한두 개도 아니고 굉장히 무성히.

창문 끝에 살짝 걸린 마른나무가 괜스레 꼴 보기 싫어 시야에 들어와도 바라보지 않았건만, 저렇게 초록 잎 단장하니 시선을 잡는다.

긴 독일의 겨울, 그 기다림 가운데 잎새 하나만 미리 내어 줬더라도, 기다림이 이렇게나 힘들었을까. 저렇게 한 번에 무성히 내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한 잎새만 먼저 피었더라도…


3일에 한 번꼴로 외출을 한다. 아직 부활절 휴일인데 그것도 모르고 장바구니를 들고 산책을 나간다.

오후의 노란빛을 가득 받은 공원이 푸르르다. 정처 없는 산책길 마음 따라 발길 옮기다 보니 연한 푸른빛들 사이에 파묻혀있다.

새 순들이 토닥토닥 안아주며 나를 반긴다. 너에게도 너의 때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매 순간 일들이 잘 풀려나가며 회복을 기대하지만, 그 어떤 회복도 주어지지 않는 겨울 같은 기간이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간 지속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일이 잘 풀리면 좋을 텐데 라는 희망을 갖지만, 희망조차 사치였다는 듯이 첩첩이 겹치는 문제들에, 그리고 장기화되는 곤란한 상황에 무거운 마음 이끌고 겨우 겨우 겨울을 낸다.

봄 잎새가 대답한다. 자연의 섭리를 닮은 인간의 삶이라면, 언젠가 너의 때가 다가왔을 때, 하나, 두 개 그런 회복이 아니라 전체적인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그 겨울날 너는 그냥 뿌리를 깊게 내리고, 그 찬 바람과 구름과 비와 눈과 고독과 쓸쓸함을 온전히 견뎌내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너도 모르게, 너에게 깊게 자리한 뿌리 박힌 생명력이 너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무성한 봄날의 새싹 축제처럼. 그렇게 말한다. 너의 때가 오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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