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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23. 2024

이곳 떠나 저곳으로 갈 때는 모든 것이 짐이다.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26일 차, 20200412

이제 다음 주면 정 하나 들지 않은 이 공간을 떠난다. 기억은 많이 있지만 추억은 적은 공간.

이 공간을 떠나기 위해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먼저는 이제 한 동안 사용하지 않을 겨울 옷과 독일어 교제를 챙겼다.

지금 글을 쓰다 보니 사실 독일어 교제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꺼내놓고 펼쳐보지 않은지가 벌써 몇 달이 넘어서 먼지만 쌓였다 참.

또 최근 손이 덜 간 옷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예전 추억들이 서린 옷 들이다. 예를 들면 엄마가 좋아했던 바지. 아니면 엄마 몰래 산 정장.

손이 가는 물건에 깃든 추억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면 짐을 싸기 어려운 만큼 감상에 빠지곤 한다.

짐을 싸는 일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묵혀두었던 기억들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이기에.


2017년에 독일에 온 이래로 이번에 이사를 가는 횟수를 포함하면 총 7번이다. 이제 곧 8번째 이사를 올해 안에 또 해야 한다.

한 장소에 1년 이상 머무른 적은 없다. 최대한 짧게 지낸 공간은 2주. 어지간히 역마살이 낀 듯하다.

짐을 쌀 때마다 느끼지만, 다음 공간이 1년 이상 머무르게 될 공간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짐을 싸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어서가 아니라, 촉감과 시각이 끌고 가는 과거의 시간들 때문에.

늘어나는 따뜻한 치즈처럼 묻어 나오는 과거의 시간들은 가끔 혼자서는 끊기 힘들 만큼 축 늘어진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매 번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면서 이사를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짐이 쌓여만 간다. 더욱이 물건을 버리기란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여행용 가방 2개만 들고 온 유럽인데 이제는 상자가 몇 개가 나오고 자동차를 빌리지 않으면 옮기기 힘든 양이되었다.


그만큼 욕심이 많다.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한국인이 독일인 따라 하다가 가랑이 찢어지고 피 철철 흐르는데 거기에 거적때기 부여 대고 애써 피 안 나는 척하는 격이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 한국인처럼 김치 먹다가 똥구멍에 불나는 격인 것이다.

이제 그런 욕심으로 생긴 문제를 막기 위한 것들이 필요하다. 거적때기처럼. 잠시 찢어진 가랑이 좀 살피고 온다.

정착하지 않은 나에게 물욕은 욕심 그대로 사치이다. 아무쪼록 그렇게 늘어난 것이 짐이다. 말 그대로, 짐.


이곳 떠나 저곳으로 갈 때는 모든 것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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