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릐 Jan 23. 2024

서러움이 너를 잡아먹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29일 차, 20200415

 서러움이 너를 잡아먹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그렇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가지 사항은 지켜야 한다. 


  

     밥 먹을 힘이 없어도 뭐라도 먹기   


     춥게 하지 않기   


     잠이 오지 않더라도 잠을 자기   


긴장감에 하루 종일 사로잡혀 지냈다. 괜스레 이 공간에서 보냈던 좋은 추억들이 잔뜩 생각나서 나의 선택을 의심하게 하고,

꼭 떠날 때에는 지금 이 공간이 좀 더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차량을 이용할 때면 무사히 차량을 주차할 공간이 생길지 조마조마 마음 졸이고. 

초행 운전길 별일 없을지 괜스레 걱정. 차량 대여할 때마다 찾아오는 무보험의 압박. 독일의 낯선 교통체계에 외제차로만 가득 찬 도로들. 

이 모든 긴장감을 통틀어 이사 전 증후군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이 증후군은 이사 당일이면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예를 들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파서 기력이 떨어짐을 느끼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게 된다는 등. 잔뜩 쌓아둔 짐들을 보면 언제 다 푸나 싶을 정도로 앞이 막막해지거나. 혹은 낯선 공간의 내 모습조차 낯설어 새로 적응할 나날들이 막막하다는 것. 그럴 때면 아무리 좁고 답답해도, 그냥 그 물침대 같은 침대에서 부대끼며 지내고 싶기도. 

대화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오묘한 이 기분은 친숙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좀 나아질까. 형과, 아빠와, 그리고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다들 한국에 있는 사람이라서 비로소 혼자 있게 되는 밤 시간은 괜스레 두렵다. 근데 이미 밤이니, 뭘 좀 먹어야겠구나. 

잔뜩 쌓인 짐 앞에서 허기짐은 없지만 기력이 빠짐을 느껴서 식사를 생각하는 내 모습이 잠깐 처량하게 느끼다가도, 밥까지 제대로 못 먹으면 더욱 처량해질까 봐 부지런하게 나를 부엌으로 몰고 간다. 


낯선 주방에서 낯설게 끓이는 라면. 익숙한 맛이 오랜만이다.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먹음으로써 얻는 서럽지 않음으로 위안을 받는다.


낮에는 좋은 햇살 핑계 삼아 아직도 낯선 이 도시의 더욱 낯선 동네를 정처 없이 걸었다. 예전 살던 곳에 비하면   

주거지역이라 더 조용하고, 더 푸르르고 주변 슈퍼마켓도 더 가깝다. 심지어 중동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다채로운 음식점과 식료품점도 있다.

그렇게 나가고 싶던 그 좁아터진 방에 비하면 새 방은 궁궐 같은 방이지만 내 마음속 무언가 불만 가득한 것은 

눈동자 하나 비추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배추도사의 시래기 버전 같은 느낌으로 등장하신 집주인아줌마의 까탈스러움 때문인지,

필요한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방에 무엇 하나 어울리는 가구가 없어서인지, 예전보다 훨씬 커진 침대지만 내 갈비인지 침대 갈비인지 헷갈리게 하는 얇은 매트리스 때문인지,


아마도 잔뜩 싼 이 짐들을 풀기엔 지금 이 공간은 아직 아니라는 사실 때문은 아닌지.

4월 중순이 넘었어도 군용 깔깔이를 껴입고 애써 잠을 청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 아픔 가득했던 Friedrichshai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