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릐 Jan 29. 2024

이제 곧 눈을 떠야 하지 않겠는가.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55일 차, 20200511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오려고 시간에 맞추어 함부르크 중앙역으로 향한다.

여유 있게 짐을 싸고 중앙역에 도착했는데 웬걸, 여자친구가 핸드폰을 집에 놓고 왔다고 한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핸드폰을 가지러 가는데 기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차량으로 중앙역에서 여자친구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9분. 과연 무사히 기차를 탈 수 있을 것인가.

천운이 따른 건지 헐레벌떡 뛰어서 도착했다. 무사히 기차를 탄다.


승객이 많이 타지 않은 기차에 마스크를 쓰고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황사용 마스크라 그런지 조금만 말을 하거나 걸어도 숨이 많이 찬다.

특히나 날이 조금 따뜻해지니 괜스레 숨이 더 가빠오는 듯하다.


붉은 벽돌집이 유독 많은 함부르크 부둣가 사이를 지나서 다리를 건너 함부르크를 빠져나온다.

봄 햇빛 받아 노랗게 빛나는 붉은 벽돌들이 고풍스러운 도시의 분위기를 한층 더 격양시킨다.

저런 집에는 누가 살까 새로 구한 내 집은 저기에 비하면 한 없이 초라하기만 한데

비교적 열등감 생기려고 할 즈음 열차가 도시를 천천히 빠져나가 풍경이 바뀐다.

텅텅 빈 열차 안을 비웃듯 무성한 수풀들이 창 밖을 가득 채운다.


빼곡하게 채워진 기찻길 옆 둑 너머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

아직 덜 여물은 초록색 잎사귀는 사춘기 소년들처럼 씩씩하지만 풋풋하다.

수풀 사이를 뚫고 열차 안까지 비추는 햇빛은 어떻게든 열차 속 사람들도 봄 빛으로 물들이려 하지만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얼굴엔 아무 감흥이 없어, 무안해진 햇빛은 다시 고개를 숨기지만

이내 아쉬움 못 숨기고 여러 번 열차 안에 포근함을 내리쬔다.

아아, 무심한 인간이여. 이제 곧 눈을 떠야 하지 않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온전히 지나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