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이 되면 피아노학원 대신 보습학원을 가는 게 좋겠어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갈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그 갈망은 외부로 향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청소년기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 순간부터 오히려 나는 너무도 조용했고 소심한 아이였다.
여덟 살이었다. 가세가 기울 정도로 큰 사기를 맞은 우리 가족은 빚을 갚기 위해 온 삶을 집중했다. 물론 나는 스스로 잘 성장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다섯 살 나이 차이 나는 언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나와 달랐다. 그때 깨달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갈망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언니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는 성격이었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던 집이었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생각한 지점이 바로 원하는 것이 많이 없었기에 무난했다는 것. 반면에 나는 배우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늘 하고 싶은 것을 많이 감추고 혼자 공상하며 그림이나 글로 풀어 나갔다.
강렬한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날 친구 따라 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가족회의가 열렸다. 결론은 언니가 배웠을 때 성과가 크게 없었고 나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보이니 4학년이 되면 보습학원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데 왜 학원을 다녀야 하지? 지금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고 피아노 치는 법을 잘 알고 싶은 건데. 그렇게 나의 잠재력은 공부로 단정 지어졌고 어른이 되어서도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다. 자존심이 센 부모님이 당장 돈이 없어 피아노 학원을 보내줄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원하는 것을 말하면 공기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나는 마음속에서 갈망이라는 씨앗을 심어서 키우고 있었다.
갈망이라는 식물은 어느 정도 자라다가 잠시 성장을 멈추었고 돈을 벌기 시작한 때부터 원하는 방향을 틀어 마구 자라나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여행지, 배우고 싶은 취미, 보고 싶은 영화 등 갈망이라는 잎은 햇볕을 비춰주면 비춰주는 대로 방향을 틀어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돈과 상관없이 그저 주저하는 내가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절제하는 요령을 터득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늘 두려움이 따라왔다. 사주를 보면 안정적인 직장에 뿌리내려 차근차근 승진하면서 지낼 아이인데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갈망과 사주 사이에서 아직도 나는 나의 길이 맞는지 불안에 떨고 있다. 이미 가지를 뻗을 방향이 정해져서도 의문을 품는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맞는가? 혼자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으로 원하는 모습과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가? 다양한 의문 속에서 또 나는 글을 쓰고 있고 하늘을 보고 공상을 한다.
갈망, 이 한 단어로도 풀 수 있는 나의 이야기는 많겠지만 결국은 지금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그 원망에 갇혀서 나에게 햇볕을 쬐어주고 물을 주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니까.
오늘도 나는 커피를 내리고 드문드문 손님이 오고 원하는 것을 채워나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