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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위로 Dec 12. 2018

요즘 영화들

그리고, 나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글쎄, 이유를 들자면 영화라는 매체가 갑자기 끌린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신나고 잔인하고 자극적인 영화만 찾던 내가, 상업영화에 취했던 내가 어느새 예술영화에 푹 빠져있을 때에는 내가 왜 이러지 싶기도 했다.


영화를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코끼리의 코만 만지고 코끼리가 길쭉하다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고 여러 종류의 영화를 보지 않았던 나는 영화인이 아니었다. 침이 마르게 영화를 칭찬할 줄은 알았지만, 영화의 단점을 연구하고 비평할 줄은 몰랐다. 비평을 한다고 해도 얼렁뚱땅 넘어가고, 비평이라 해 봤자 한쪽으로만 치우쳐 영화에 대해 궤변만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에 관련된 글을 한결 세련되게(?) 쓰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관성이 있게 말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앞에서 전개가 좋았다 하고 뒤에선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 하면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단점을 고치려 블로그라는 신문물(?)도 만져보며 열심히 노력중이다.


영화의 영 자도 몰랐던 내게 지금 와서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상업영화들이었다.



<신과함께 : 죄와 벌>이 그 이유였다. 이 영화를 관람하는 중의 느낌, 그러니까 막판 장면의 느낌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벅차올랐었다. 그들이 울고 나도 울고 내 옆자리 사람도 울고 저 위 자리의 아이도 울었다. 모두가 울음바다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는데, 잠시 생각을 해 보니 이상했다.


이 영화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허점 투성이에 신파 덩어리였다. 귀인이라는 직책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었고, 제대로 된 대립을 그리다가도 다른 길로 급선회해서 영화가 산으로 갔다. 막판의 장면도 모성애만을 돌려 부름으로써 당연한 감동이 아닌 억지로 만든 감동과 감성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기에 울었던 것이지, 진정으로 그 장면에 무슨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되어 비주얼은 그 무엇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영화의 시나리오는 엉망인 경우, 그런데도 관객들은 그것에 혹해 다시 극장으로 향하는 경우였다. <신과함께 : 죄와벌>의 경우는 그를 잘 활용한 경우였다.


1700만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명량>과 <국제시장>, <7번방의 선물>도 다를 것이 없었다. 모조리 신파이거나 완성도는 엉망인 경우였다. 초중반은 한없이 지루했지만 비주얼이나 막판의 신파로 모조리 쓸어버려 지루함은 생각도 안 나게 하는 옛날 수법. 한국 상업영화는 예전에 비해 오히려 퇴보한 듯 했다.

(최근의 <창궐>과 <호두까끼 인형과 4개의 왕국> 또한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이것이 내가 이 매거진을 시작한 이유이다. 일종의 '심심할 때 꺼내보는 명작들'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모두에게 개인차가 있을 수는 있으나, 영화의 설명을 경박하지 않고 진중하게 쓸 예정이니 글을 끝까지 읽어준다면 고마울 것 같다. 언젠가는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겠지.. 라는 뜻으로 글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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