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카페에서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점잖게 시작된 이야기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목소리가 커지며, 마치 싸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들의 요란스러운 소리에 옆자리에 앉은 사내는 불만이 많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그저 그들을 향해 볼멘 표정을 지으면서 조용히 있을 뿐이다.
-우리끼리 싸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판정해 달라고 해봅시다.
-아, 좋지. 그러자고.
그러면서 그들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 사내에게 다가간다. 사내는 잔뜩 긴장한 채, 그리고 살짝 주눅이 든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이보쇼, 우리가 뭔가 얘기를 하는 것이 있는데, 대체 누가 최고인지 결정이 안 돼서 말이오. 당신이 좀 듣고 누가 최고인지 판정을 해 주시겠소? 내 먼저 시작할 테니 잘 들어보쇼.
남자는 사내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유치해라고 한다오. 내가 가장 잘하는 말은 이름 그대로 ‘유치해’지. 그가 글을 쓸 때엔 항상 옆에서 대기하다가, ‘유치해’라고 내뱉으면, 그는 멈칫하면서 창작 욕구를 잃어버리기 일쑤지. 그가 중학교 2학년 일 때, 그때가 최고였지. 친구들 앞에서 ‘유치해’란 말을 듣고, 그는 책상에 엎드려 속으로 울었지. 난 그의 창조성의 씨앗을 매정하게, 완전히 짓밟아 버렸다네. 솔직히 그때 난 그가 글쓰기를 완전히 포기할 줄 알았네. 실제로도 그랬었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더라고. 그럴 때마다 난 다시 그에게 말을 해주었다네. 그가 내성이 생겼는지 그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어. 그러면 나는 ‘진부해’, ‘뻔해’라고 달리 표현해서 말하지. 그럼 그는 또 주저앉고 말거든. 나는 가만히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계속 노력하고, 성장하면서 그를 방해하지. 그의 글쓰기 욕구를 0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나야말로 그의 창조성을 파괴하는 최고 능력자가 아닌가?
-아니지, 아니야. 자넨 내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니깐, 나는 ‘나만 못써’일세. 이름 그대로 그가 글을 쓸 때마다 ‘나만 못 쓰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네. 나의 주특기는 ‘비교’일세, 그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면, ‘우와 누구랑 달리 독창적인데’, ‘정말 매력적인데’, ‘어떻게 저런 경험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런 기발한 은유를 할 수 있지?’, ‘다양한 언어 표현에 눈에 보이는 듯한 묘사라니?’ 등등의 말을 하지. 그러면서 ‘미사여구를 늘여놓지 않아도 아름다운 글, 자네는 결코 쓸 수 없을 걸’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제목만 봐도 그래, 자네는 너무 일차원적이야, 눈에 딱 띄면서도 궁금증을 일으키는 제목도 짓지 못하지.’ 뭐 이렇게 몇 마디 해주면 그는 또 거대한 벽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좌절하게 되지. 나야말로 그의 창조성을 가로막는 최고의 벽이 아니겠는가? 이보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잠깐잠깐, 아직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정은 잠시 보류해주시죠. 저는 ‘주제에’라고 합니다. 그가 글을 쓸 때면 ‘니 주제에?’라고 한마디 합니다. ‘다른 글 쓰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글을 쓰겠다’고, ‘세상에 이렇게 좋은 글들이 많은데 또 굳이 글을 써야 하냐, 그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고 말하지요. ‘세상에 있는 수많은 글보다 좋은 글을 쓸 능력도 안 되면서 왜 꼭 스스로 쓰려고 하는지, 글을 쓰겠다니, 책을 내겠다니, 자네의 주제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도 말을 던집니다. 저 친구들이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말하는데 결국은 자기 주제를 모른다는 말 아닌가요? 어때요? “주제에”라는 한 단어로 그의 기를 팍 죽여버리는, 그의 창조성을 원천 봉쇄해버리는 저야말로 최고가 아닌가요?
-아니 나일세, 내가 최고 맞지?
-이봐 유치해 씨, 아니라니깐, 나 ‘나만 못써’가 최고래도
다시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깐, 유치해 씨는 그의 글이 유치하다고 놀려서 그의 욕구를 떨어뜨리고, 나만못써 씨는 다른 사람의 글과 비교하며 떨어뜨리고, 주제에 씨는 너는 글을 쓸 재목이 아니라고, 네 제주를 알라고 말하면서 떨어뜨린다는 거죠. 음, 제가 보기엔 모두가 누가 먼저라고,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신데요.
-(다 같이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우리가 대단하단 건 우리도 알지. 그래도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다네.
-그럼 몇 가지 질문을 해볼게요, 유치해 씨. 유치한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유치한 글을 쓰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나요? (머뭇거리는 그를 외면한 채 이어서 말한다) 나만못써 씨, 다른 사람의 글이 뛰어나다면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또는 그가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놀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의 글을 보고 놀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뭔가 대답하려 하는 나만못써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주제에 씨, 모든 사람의 삶의 흔적이 삶의 결이 모두 다른 것처럼 글도 다르지 않을까요? 저마다의 삶이 있는 것처럼 저마다의 글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기 없는, 움츠러든 자세로 앉아 주눅 든 채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말을 이어갈수록 점점 목소리에 힘이 생기고, 눈이 맑아지며 자세가 당당해진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는 자신을 위해 글을 써요. 우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글을 썼지요. 그리고 글을 쓰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글을 써요. 자신의 상처를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쓰는 글은 유치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유치하면 어때요. 그것도 삶의 일부인데. 중요한 것은 글이 누군가에게 -그 자신이어도 돼요- 도움이 되면 되는 것이지요. (유치해 씨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 정말 감탄이 나오지요. 그 다양하면서도 독창적인 글감, 신비스러울 정도로 멋진 표현들, 눈에 보이는 듯한 살아있는 묘사,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깊은 성찰. 그것들은 질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움의 대상이 되기도 해요. 간접경험이기도 하고, 그런 표현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쓸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는 이제 질투나 시기, 좌절보다는 감동과 배움의 방법을 찾았을 것 같은데요. (나만못써 씨의 모습도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자신의 삶이 있고,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의 체험은 오직 그만의 것이고, 그만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언어의 표현이나 배움의 깊이가 중요하지 않아요. 작가라는 타이틀도 필요 없어요. 그저 그의 삶의 결에서 나오는 그의 흔적, 그의 향기, 그의 자취가 중요한 거죠. 글을 쓰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요. 자신의 내면이 시키는, 뭔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것을 그저 쓸 뿐인 거죠. 주제에라고 하는데, 맞아요. 자기 주제에 맞는 글을 쓰는 겁니다. 감히 주제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주제에 글을 쓰는 거예요.(주제에 씨의 모습도 흐려진다)
-여러분은 그의 창조성을 가로막고 짓밟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건 그도 분명히 인정할 거예요. 그는 여러분들로 인해 큰 좌절을 했었고, 한때 글쓰기를 포기한 적도 있었으니깐요. 근데 그는 여러분 덕분에 글쓰기가 더 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맷집을 키웠다고 해야 할까요? 글쓰기 근육을 키우는데 여러분의 공이 크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여러분은 그의 창조성을 가로막는 일등 공신이 아니라, 그의 창조성을 키우는 일등 공신이었던 거예요. 아마 그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의 글이 여러모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어때요, 그게 그인걸요. 그답잖아요. 여러분의 역할은 이제 충분한 것 같아요. 이제 사라지셔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내가 말을 마치자, 흐릿해지던 세 사람의 몸에서 빛이 빠져나와 사내에게 흡수된다. 생기 가득한 두 눈을 가진 사내는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