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세처럼 Sep 18. 2021

나도 할 수 있었구나

음악 듣고 글쓰기

부장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그녀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다. 며칠 동안 밤을 새가며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가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내뱉어진 "별론데"라는 단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아니, 그럼 직접 하시든가. 왜 안되는지 얘기라도 해주던가' 누군가에게 푸념이라도 던지고 싶지만, 체면상 그럴 수는 없다. 다만,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해한다는 듯이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길에 마음을 다소 누그러트릴 뿐이었다. '부장님이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아고 나정씨도 당했군요.'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쓴다. 그와의 데이트가 있는 날인데 이런 기분으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와의 데이트를 생각하자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부장님한테 당한 서러움이 흐물흐물 사라지는 듯하다.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퇴근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부장실의 문이 열린다.

"이 팀장 내일까지 할 수 있겠어?"

"부장님, 내일까지는 좀,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

"그래도, 그게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인데"

"중요한 프로젝트라서 며칠 동안 밤 새가며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퇴짜를 맞았습니다. 하룻밤새 나올 계획이 아닙니다. 며칠 또 밤을 새워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내일까지 못합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속사포처럼 쏟아부었다. 나정씨의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른-하지만 뼈 있는-말에 부장님이 순간 당황했고, 그녀는 가슴이 빠르게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순간 눈이 마주친 옆자리 동료의 '엄지 척'사인에 용기를 내면서 얼른 문을 열고 퇴근해버렸다.


약속 장소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그는 약속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녀가 쉽게 갈 수 있는 곳에 장소를 정한다. 걸어서 10분 내외에 있는 곳, 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 등이다. 걷는 동안에 회사일도 잠시 잊고, 그와의 데이트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하늘도 보고, 가로수를 하나 둘 세어도 보고, 아스팔트 틈으로 삐죽 얼굴을 내민 풀이 보인다. 회사 근처인데 처음 가보는 길이다. 처음이 주는 설렘을 느끼며 걷는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것까지 그는 생각을 했던 걸까? 걸어가면서 그의 배려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조명은 약간 어둡지만, 막힘없이 확 트인 식당에서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역시 그가 먼저 와 있었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향한다. 손을 흔드는 그에게 그녀도 덩달아 손을 흔들며 말한다.

"역시 먼저 와 있었네."

"아, 금방 왔어."

"가끔은 내가 먼저 도착하는 기회를 주면 좋겠네. 나도 생색 좀 내보게"

"이런, 내가 언제 먼저 왔다고 생색낸 적이 있었나?"

"아니, 자기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그러고 싶다고"

"좋아, 그럼 다음엔 내가 늦게 와주지. 한번 생색낼 기회를 주지 뭐"

라고 말하며 그가 싱긋 웃는다.


'그래 저 웃음이 참 좋단 말이야.' 그의 웃음은 그녀가 생각하는 그의 최고 매력이다. 키가 크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빠진 것은 그의 당당한 태도와 해맑은 웃음이 가져오는 묘한 매력 때문이다. 그와 얘기를 하다 보면 그의 덤덤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자신도 뭔가 해보고 싶은, 잘 할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그를 만나고 나서 일을 하면 전전긍긍하던 일들이 쉽게 해결되는 신기한 경험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얘기하기 시작한다. 4일을 밤새 한 프로젝트를 '별론데'라는 단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 부장에 대한 성토가 나온다. 그녀가 얘기를 하는 동안 그는 별말 없이 듣기만 한다. '아', '저런', '너무한데' 등등 그녀의 말에 맞는 리액션만 취할 뿐이다. 그의 반응 때문일까? 오늘 그녀는 말이 많아졌다. 상사에 대한 험담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녀의 일상이나 취미까지 만물 장수가 보따리 풀듯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 말하면서 기분이 더 좋아진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말을 계속하던 그녀는 오늘 유독 그의 말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얘기를 할게 많기는 했지만, 그는 열심히 들어줬지만, 그래서 즐거운 대화가 오가긴 했지만 뭔가 다르다. 데이트에 숨어 있는 묘한 긴장이, 평소와 같지만 평소와 다른 듯한 분위기가 그녀의 레이더에 잡혔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레스토랑 한쪽에 있던 피아노에서 누군가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랩소디 인 블루'의 날카로우면서 비장한 음이 나오더니 이내 잔잔하면서도 경쾌한 연주로 넘어갔다. 그 곡이 연주되는 동안 테이블이 치워지고, 후식이 나온다. 그 사이 주변의 분위기가 바뀐다. 조명은 조금 더 어두워지고, 촛불이 하나 둘 켜진다. 조명보다 촛불이 더 강해질 즈음, 그가 잠시 나갔다 오더니 장미꽃 100송이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장미꽃을 내민다. 그녀가 장미꽃을 받아들고 웃으며 그것을 보고 있을 때, 그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넨다.


"나랑 결혼해 줄래?"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응"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상기되어 있다.

그가 그녀의 손을 가져다가 반지를 끼워준다. 그러고는 목걸이를 꺼내서 그녀의 목에 걸어준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 그녀의 눈을 손으로 살짝 훔쳐주고는 그가 그녀를 꼭 껴안으며  "행복하게 살자"라고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그의 왼손이 그녀의 오른손을 포근히 감싼 채 계속 대화가 오간다. 서로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눈은 더 깊어졌다. 행복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찬 그들의 테이블에서 나오는 기운이 레스토랑을 가득 메우고 있다. 희망을 얘기하며 레스토랑을 나오는 그들의 발걸음이 힘차다.

(끝)


=========================



 [글에 대한 설명]


참 재밌는 작업을 했다. 음악을 듣고 떠오르는 생각대로 글을 쓰는 것은 절대 못한다고 생각을 했었다.나한테는 "글을 잘 써야 한다"심한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난 느낌을 쓰려면 왠지 시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유도 많이 들어가고, 읽는 순간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환상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무의식이 강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뭔가 멋들어진 대사 있지 않은가? 그런 표현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난 못해"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유튜브에서 '랩소디 인 블루'를 찾아 틀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막 적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귀에 들려오는 "랩소디 인 블루"를 들으며 쓴 모닝페이지는 재밌었고 신선했다.


18분짜리 곡을 두 번 들으면서 썼는데, 처음에 들으면서는 곡에 대한 설명과 곡의 흐름에 대한 느낌을 썼고, 두 번째로 들을 때는 내 느낌에 맞는 상황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느낌대로 벌어지는 상황이 있을까? 고민했다. "비장 -> 경쾌 -> 즐거움 -> 신남 -> 고요 -> 절정의 감동 -> 잔잔한 행복"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려고 노력하면서 모닝페이지를 쓰다 보니 프러포즈를 받는 여인의 모습이 딱 떠올랐다. 즐거운 데이트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만나는 감동. 프러포즈를 받는 장면을 곡에서 느낀 절정의 감동의 순간으로 묘사하려고 해봤다. 모닝페이지에서 쓴 것을 토대로 쓴 글이 바로 이 짧은 소설이다.(이것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처음이었다. 첫 부분에 나오는 다시 비장한 듯 느껴지는 날카롭고 높은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사에게 왕창 깨지고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글의 흐름이 랩소디 인 블루를 들으면서 느낀 "비장 -> 경쾌 -> 즐거움 -> 신남 -> 고요 -> 절정의 감동 -> 잔잔한 행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난 못써'라고 한계를 그어버리고, '이런 글은 내가 쓸 글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외면했다면 나오지 못했을 글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내용이고 뭔가 시적인 아름다운 표현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든다.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의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그 흐름에 맞춘 글을 쓴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일이고,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그리고 름 잘 썼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기분 좋은 재미난 작업이었다.



16일 아침에 쓴 모닝페이지. 참 재미난 작업이었다.

랩소디 인 블루(조지 거슈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