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지지도 용기라는 것을 알려준 영화 히든피겨스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고
남자들에게만 허락된 회의, 캐서린(주인공, 천재 수학자)은 몇 번이나 참여하려고 했지만, 여성-그것도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화장실도 가려서 쓰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보고서도 쓸 수 없는 인종차별이 심한 곳에 접근조차 거부된 공간. 몇 차례 거절당하지만 해리슨(나사 책임자)의 용단 아래 가까스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몇몇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하는 나사 직원을 대신해 캐서린이 대신 대답한다. 로켓 회수 지점의 위치를 관계자들이 지속적으로 묻자 해리슨은 캐서린에게 분필을 건네준다. 캐서린은 칠판에 수학공식을 쓰고, 설명하며 예상 회수 지점을 알려주는데, 그 공식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캐서린에게 분필을 건네주는 이 화면이 내게 최고의 한 장면이다.
나사에서 캐서린이 새로 일을 하게 된 중추 건물에는 유색인종 화장실이 따로 없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참고 참고 참다가 정 참을 수 없을 때, 일하던 것들을 들고 화장실이 있는 다른 건물을 향해 뛰어간다. 그리고 볼일을 보며 일을 한다. 비가 와도 비를 맞으며 화장실을 다녀온다. 매일 사라지는 그녀를 어느 날 해리슨이 추궁한다. '대체 어딜 갔다 왔냐고? 왜 매번 중요한 순간에 사라지냐고?' 그렇게 묻는 책임자에게 캐서린은 절규하듯 소리친다. '이 건물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습니다. 화장실이 있는 건물을 찾아 매일 몇백 미터를 뛰어갔다 옵니다. 유색인종만 마시는 물을 마시고...'라고 외친다. 주변에 앉아 있는 직원들은 스스로 할 말이 없다. 이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이 캐서린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으니깐. 폭발할 듯 외치는 이 절규에 영화를 보는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과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날 책임자는 직접 해머를 들고, 'colored women restroom' 팻말을 떼어낸다. 팻말을 향해 해머를 내리치는 그의 양 옆으로 한쪽에는 흑인 여성들이, 다른 한쪽에는 백인들이 서 있다. 놀라우면서도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흑인들과 놀라면서도 우려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백인들의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가 있을 것이다. 화장실 팻말을 든 그는 "이제 나사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다. 아무 화장실이나 써라, 나사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색깔을 소변을 본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흑인 여성들은 환희에 찬 모습으로 바라본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과 새로운 시대가 될 때가 되었다는 예감과 책임자로서의 자각이 있었을까? 처음부터 캐서린에게 우호적이되 친밀해질 수는 없는, 그녀를 인정하되 받아들일 수는 없는 그런 구조 속에서 그는 어떤 심리적 갈등을 겪었을까?
도로시(캐서린의 동료)는 캐서린과 같이 일하는 서관 전산원 - 유색인종만 있는 - 이다. IBM의 슈퍼컴퓨터가 나사에 들어오고, 전산원들이 모두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라고 망연자실할 때-즉 해고를 기다릴 때-그녀는 색다른 전략을 취한다. 컴퓨터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컴퓨터 언어 포트란을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혼자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흑인 전산원 모두에게 그것을 가르치면서 함께 그날을 준비한다. 컴퓨터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될 때, 그녀는 팀원들과 함께 - 이점이 도로시의 핵심 포인트다 - IBM 컴퓨터를 관리하기 위해 스카우트되고 수십명의 흑인 여성들이 당당하게 걸어가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도로시는 흑인여성 최초 주임이 된다. 백인 여성들을 (동관 전산원) 가르치게까지 된다. 동료의 앞날까지 같이 고민하는 그녀의 리더십이 존경스럽다.
메리 잭슨(캐서린의 동료)은 엔지니어가 되고자 한다. 그녀가 엔지니어가 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이 깨림칙한 그들(백인)은 특정 교과목을 이수해야 지원할 수 있도록 지원조건을 강화한다. 그 과목을 가르치는 곳은 백인 전용 학교밖에 없다. 흑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학교를 향해, 그녀는 법적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그 권리를 찾는다. 쟁취한다. 판사의 이력을 조사한 그녀는 그에게 있는 "최초"라는 타이틀, "최초가 겪는 어려움과 위대함"을 얘기하며, 자신은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가 될 것이고, 판사님은 그 계기를 만들어준 최초의 판사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흐름을 인지한 판사는 그녀에게 "야간만 허락한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처음으로 학교에 갔을 때, 백인 남성들이 의아해하고, 교수가 그를 막지만, 그녀는 판결문을 보여주며 당당하게 자리에 앉는다.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의 인생관은 따라 하고 싶다.
캐서린의 일이 끝나고, 더 이상 그녀가 그곳에 있을 자리는 없다. 그리고 그녀는(도로시와 그녀의 팀원들 역시) 다시 원 소속이었던 전산실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해리슨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발사를 하기 직전 컴퓨터가 이틀간 다른 계산 결과를 쏟아내자, 캐서린을 믿는 조종사는 그에게 계산을 요청하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계산이 맞다면 믿고 갈 수 있다고, 해리슨은 사람을 보내 캐서린에게 계산을 부탁하고, 캐서린은 자신의 온 신경을 집중해 계산해내고 그 결과를 갖다 준다. 하지만 문 앞에서 결과만 전달해줄 뿐, 그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낙심하며 돌아서는 데, 그가 출입증을 건네주며 캐서린을 안으로 들여보낸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히든 피겨가 역사적인 순간에 숨겨지지 않고 그 자리에 함께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실존인물인 세 흑인 여성의 생을 짧게 소개하며 마무리된다. 나사 최초 흑인 여성 수학자, 최초의 흑인 여성 IBM과장,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 그녀들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게 마무리되었다.
영화를 보면서는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벽을 허물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그녀들에게 큰 시선이 갔다. 말도 안 되는 차별이 당연하게 인식되던, 비정상이 정상인 그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그녀들의 의지와 끈기는 눈을 뗄레야 땔 수 없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니 해리슨이 계속 눈에 밟힌다. 그녀들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아른거린다. 그녀들의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결국 그녀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을 믿고 의지해 주는 동료들,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고 인정해주는, 그 노고를 알아주는, 결국은 그녀가 배제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주는 해리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한계 - 그것이 편견이든, 차별이든, 비정상적인 법이든 - 를 넘어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인의 능력과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가 글을 계속 쓰려고 노력하는 것도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나의 글을 매번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을 믿고 인정하며 지지해준 적이 있는가?', '편견으로 한 사람의 능력을 잘못 본 경우는 없지 않은가?' 한 편의 영화가 내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떳떳한 삶을 살아왔는가? 반문해 본다. 대답은 지금 당장 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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