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호] 나를 보여주는 책 한 권
: [O-24의 첫사랑]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뽑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알림이 울리고, 카톡 메시지가 쌓이고,
감정마저 즉각 반응해야 뒤처지지 않을 것 같은 요즘.
그럴 때면 나는 1997년의 어느 날로 도망친다.
삐삐 숫자로 마음을 전하던 시절,
H.O.T와 언타이틀의 노래가 거리에 울려 퍼지고,
문방구 앞 뽑기 기계 앞에서
작은 행운 하나를 바라던 그때로 말이다.
그 시절의 나에겐
마음을 사로잡았던 만화,
『언플러그드 보이』가 있었다.
이 만화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
학교라는 틀을 잠시 벗어난 한 아이가
지율이라는 친구를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현겸이는
세상이라는 플러그가 아직 꽂히지 않은 채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소년이다.
그러다 ‘사춘기’라는 플러그가 꽂히며
비로소 어른의 세계로 한 발을 내딛는다.
이 만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현겸이가 처음 놀이터에서 만난 지율이를 위로하며 한 말이다.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지금 보면 조금 오글거리는 대사일지 모르지만
부모의 불화에 다친 마음을 풀어낼 곳을 찾지 못한 아이가
고장 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생존법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내 나이가 된 딸아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기는 나를 닮은 아이의 옆모습 위로
나의 90년대가 스쳐 보인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운 세기말의 무드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이라는 거친 전류로부터
차단(unplugged) 된 상태로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모자람과 서투름 뒤에는
언제나
“그럴 수 있지.”
“그럼 뭐 어때.”라고 말해주던 그들이 있었고
그 말들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되었다.
국가 전체가 흔들리던 IMF 시절에도
나는 그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도 모른 채 철없는 사춘기를 지나왔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어깨 위에 얹힌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끝내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마 지금 내가 내 아이를 바라보는 이 마음으로,
그분들도 온 힘을 다해 나의 세계를 지켜주셨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언플러그드 되어 있어도 괜찮았다.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지금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거창하게 큰 미래를 바꾸기보다는
그저 그 평범하고 따뜻했던 풍경 속에 가만히 머물고 싶다.
스르르 감긴 눈을 떠보니
20평 좁은 우리 집, 내 방의 천장이다.
다섯 살이 된 동생이
헤실헤실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온다.
“누나야, 같이 놀자!”
그때는 귀찮기만 했던 동생의 보챔이 따뜻하게 눈을 적신다.
작은 방 안 가득 차 있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 견고한 행복 속으로 다시 한번 몸을 뉘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