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바람 May 24. 2020

불쌍한 준영이

<부부의 세계>를 보고 나서

꿈인 듯 아닌 듯 준영이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그렇게 집을 나가버린 준영이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렇게까지? 부모가 재결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럼 준영이에겐 잘된 일 아닌가?'

도망치던 준영이의 마지막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제야 준영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준영이가 도망치기 직전 선우와 태오가 부둥켜안던 모습이 준영이에게는 부모의 이혼만큼이나 세상이 무너지는 사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선우 부부가 자식에게 저지른 정서적 폭력을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선우 입장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선우 자신에게 몰입한 나머지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빠가 다른 여자 만난 거? 엄마를 배신한 거지, 나까진 아니야. 이혼하지 마. 엄마가 아빠 한 번만 봐주면 되잖아."

6회 마지막 장면에서 준영이가 한 말이다. 당시에는 나도 지선우처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어떻게 아들까지...'


그러고 보니 선우는 준영이와 소통을 한 적이 없다. 아들은 당연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 아들과 자신의 동일시는 결국 철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지선우는 아들이 찍은 비디오를 통해 준영이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남편을 자신의 인생에서 깨끗이 도려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준영이는 없었다.

"내 아들, 내 집, 내 인생, 뭐가 됐든 내 거 중에 어떤 것도 손해 볼 수 없어요." 하고 말하던 선우는 결국 준영이를 소유물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그녀는 양육권 때문에, 자신의 욕심 때문에, 준영이가 아빠의 폭력을 목격하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부작용은 준영이의 도벽으로 드러난다. 부모가 이혼하고 2년 동안 지선우와 준영이는 진정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기껏해야 "학원 어디 등록할까?"가 전부다. 그 병든 마음은 준영이가 훔친 물건들처럼 상자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선우가 준영이와 소통한 장면이 한 번 나온다.

"남편이 그리웠었나 봐."

태오와 잔 걸 해명하기 위해 아들과 했던 대화다. 말 같지 않은 말이라도 진정성은 통한다. 이 대화 이후 아들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지선우는 또 한 번 이기적인 사랑을 다시 드러낸다. 남편과의 식사 자리를 갖는 것에 아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 그 자리가 좋은 마무리를 위한 자리가 될 거라는 건 지선우의 바람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구실을 들이밀어 태오와의 질긴 인연을 또 한 번 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 다시 받아줘. 당신도 바라잖아.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만든 거 아니야?"라는 남편의 말에 준영이가 "그런 거였어 엄마?" 하고 배신감을 느끼듯이 말한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주저앉는다. 아빠의 사진을 힘들게 핸드폰에서 지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세계가 또다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선우는 아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라고 말했지만 아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자리였을까?


설상가상으로 이태오는 자살을 하려고 달려오는 차 앞에 뛰어든다. 준영이가 보는 앞에서. 그 지독한 이기심에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때보다 더한 분노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지선우도 자살을 시도했었다. 그녀의 죽음이 아들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거라는 걸 정말 몰랐을까?


지선우를 고산에서 쫓아내기 위해 준영이를 이용한 여다경은 또 어떠한가? 드라마 속 준영이는 어른들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게 이용당한다.


이야기할수록 사랑으로 포장된 그들의 횡포는 끝이 없다. 선우와 태오의 마음속에 준영이가 있기는 했을까? 준영이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도망쳤던 것은 아닐까?


박인규가 선우를 협박하기 위해 보냈던 피 흘리던 작은 새가 실제로 상처받은 준영이의 모습으로 그대로 오버랩되는 게 나뿐일까?


"당신 그거 사랑이야."

선우에게 집착 증세를 보이는 태오를 향해 박인규가 말한다. 민현서를 향하던 인규의 마음이 선우를 향하던 태오의 마음과 같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이라면, 준영이를 항한 선우의 마음이 그것과 달랐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드라마는 <부부의 세계>였지 <부모의 세계>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다."

마지막 지선우의 대사가 마음속에서 오래 울린다. 1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준영이를 결말로 내걸면서 드라마는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단순한 막장 불륜 드라마와는 다른 작품성을 그 결말에서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선우의 입장이었다면 그녀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이 아름다운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